1964년 오늘, 조선일보 1면에 실린 기사를 이유로 조선일보 기자인 리영희와 편집국장 선우휘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기사가 삭제되는 일이 벌어졌다. 

1955년 만들어진 아시아·아프리카회의는 냉전시대에도 미소동맹에 참여하지 않은 제3세계 나라들의 연대 기구다. 이들은 남북한을 동시에 초청하고 유엔에 동시 가입안 제출 방안을 준비했다. 1964년 11월21일 조선일보는 이 내용을 보도하면서 남한의 유엔 단독가입 문제는 유엔 의제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예상을 함께 전했다. 정부는 남한의 유엔 단독 가입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일보 기사는 정부 입장과 배치되는 논조였다. 

그러자 중앙정보부는 전국 주요 철도역에 도착한 신문 1·2판과 서울시내 가판을 압수하고 조선일보사에 가서 해당 기사를 삭제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편집국장과 기자가 수사기관에 임의동행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 1964년 11월21일자 조선일보 1면
▲ 1964년 11월21일자 조선일보 1면

이날 조선일보 1면 <‘한국문제 유엔 관계보도’로 각 지방서 본보를 압수>란 기사를 보면 경찰은 대구·원주·파주 등 조선일보를 불법 압수하고 배포를 방해했는데 그 규모가 거의 전국적이었다. 이날 조선일보 13만부가 압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일보는 “본사 선우휘 편집국장은 21일 상오(오전) 1시반, 정치부 이영희 기자는 상오 4시 각각 모수사기관에 임의동행되었다”고 보도했다. 

다음날인 1964년 11월22일 조선일보 1면을 보면 선우휘와 리영희를 반공법과 특정범죄처벌에 관한 임시특례법 위반 혐의로 구속해 21일 오후 9시15분 서울교도소(서대문구치소)에 수감했다. 

▲ 1964년 11월22일 조선일보 1면
▲ 1964년 11월22일 조선일보 1면

같은 해 11월27일 구속적부심에서 선우휘가 석방됐고, 리영희는 기각돼 12월6일 서울지검 공안부의 불기소 처분으로 27일 만에 풀려났다. 

한국기자협회 언론분과는 당시 공안부장관과 중앙정보부장 등에게 항의했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성명서를 전달하며 반발했다. 1964년 12월15일 기자협회보는 ‘리영희 기자 석방 요구’란 제목의 기사로 당시 사건을 소개했고, 2월15일자엔 그의 옥중후기를 실었다. 

선우휘 아들은 현 조선일보 편집국장 선우정이다. 

▲ 리영희. 미디어오늘 자료 사진
▲ 리영희. 미디어오늘 자료 사진

한편 1997년 11월21일, 대한민국 정부는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했다. IMF는 한국경제 체질을 완전히 바꿀 조치들을 요구했고 이후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실업자가 대거 양산되는 등 부작용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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