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월27일, 소련(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프라우다지 평양지국의 이동준 기자가 판문점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했다. 

‘프라우다’는 러시아어로 ‘진실’이란 뜻으로 러시아혁명(1917년 10월) 이전인 1912년 5월 레닌이 혁명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창간해 소련 공산당 붕괴(1991년) 전까지 공산당 입장을 대변하던 신문이다.

당시 판문점에선 제96차 군사정전위원회가 열리고 있었고 이 기자는 현장에서 취재 중이었다. 북측 대표가 비난을 퍼붓는 사이 북한 기자와 군인들 눈을 피해 유엔(UN)군 전방기지 사무소로 넘어왔다. 이 기자는 입던 양복을 벗어놓고 유엔군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 서울로 왔다. 

▲ 1959년 1월27일 한국으로 넘어온 이동준 기자가 다음날인 28일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 1959년 1월27일 한국으로 넘어온 이동준 기자가 다음날인 28일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이날 동아일보 석간 3면 기사 <북한동포의 반은 죽은 목숨 ‘푸라우다’지 기자 이북실정을 폭로>를 보면 “푸라우다(프라우다) 평양 주재 한인기자 이동준 군”은 한국으로 온 다음날인 28일 오전 10시 유엔군사령부 주선으로 조선호텔 1층 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자유를 얻기 위해 망명했다며 북한 사회를 비판했다. 이날 회견에는 100여명에 달하는 국내외 기자들이 참석했다. 이 기자는 탈출 당시 입었던 양복을 입었다. 

이 기자는 판문점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해 1956년 평양에 있던 소련 프라우다지 평양지국에 취직했고 앞서 1월24일에도 판문점에 취재하러 왔지만 프라우다지의 다른 기자와 동행해 탈출할 수 없었다고 했다. 동아일보는 “그의 소원인 ‘월남’에 성공했는데 이 기자는 그때 소감을 ‘그저 감개무량하다’고만 말했다”고 전했다. 

이 기자는 북한 사회를 비판했다. 그는 “북한 인민들은 일오시간(15시간) 내지 일육시간(16시간)의 강제노동과 형편없는 식생활 그리고 소위 ‘사회주의 건설’이라는 이름 아래 모두가 절반은 죽은 목숨이다”라고 말했다. 

▲ 1959년 1월28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   기사
▲ 1959년 1월28일자 동아일보 석간 3면 기사

이날 회견에서 ‘북한에서 지배세력은 중공이냐 소련이냐’는 질문에 이 기자는 “한마디로 답변하기 어렵지만 중공은 북한에 (한국전쟁 당시) 지원군을 보내왔고 소련은 중공의 상전”이라며 “다만 북한정권이 괴뢰(꼭두각시, 앞잡이) 임에는 틀림없다”고 답했다. 

한편 2003년 1월27일, 정부가 휴대전화 앞번호(식별번호)를 ‘010’으로 통합방안과 번호이동성 제도를 2004년 1월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통신위원회는 번호이동으로 특정업체로 가입자가 몰리는 현상을 막기 위해 간격을 두고 일방향 이동을 허용했다. 당시 통신위 결정에 1위 사업자인 SKT는 반발했고 2~3위 사업자인 KTF(케이티프리텔)와 LG텔레콤은 환영했다. 통신위는 당시 정보통신부 산하 규제기구로 2008년 방송통신위원회로 흡수통합됐다.

▲ 휴대전화. 사진=pixabay
▲ 휴대전화. 사진=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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