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5일 케이블TV(종합유선방송)가 전국 시험방송을 했다. 1951년 1월5일에는 독립신문 창간 주역인 서재필이 세상을 떠났다. 

시험방송에 전체 참여대상 방송사는 51개 중 31곳 방송사만 참여했다. 기존 시범구역을 빼면 1만명이 되지 않는 가구를 대상으로 했다. 프로그램공급자, 방송사, 전송망과 분배망 등 기술적으로 준비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구 등 일부 지역에선 방송이 지연되는 일도 있었다. 

▲ 케이블TV 원리. 사진=유튜브 'KTV 아카이브' 갈무리
▲ 케이블TV 원리. 사진=유튜브 'KTV 아카이브' 갈무리

이날 연합뉴스 기사를 보면 시험방송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기대를 보였고 케이블TV 가입절차 관련 문의전화가 이어졌다. 방송내용을 감독하는 기구인 종합유선방송위원회는 “이날 오전 시험방송 프로그램을 송출한 31개 SO(종합유선방송사)가운데 2개의 SO 송출화면만 불량했다”고 밝혔다. 

종합유선방송위원회 심의본부에 설치된 21개 모니터에는 MBN 경제뉴스를 포함해 캐치원의 영화 인도차이나, 현대방송의 시리즈외화 삼국지, 뮤직네트워크의 해외 뮤직비디오, 한국스포츠TV의 농구경기중계, 채널Q의 다큐멘터리 ‘최후의 원시림-마누’ 등이 나왔다. 연합TV뉴스 등은 자막방송으로 화면과 기기를 테스트하는데 그치기도 했다. 

▲ 서재필. 사진=서재필기념회 누리집 갈무리
▲ 서재필. 사진=서재필기념회 누리집 갈무리

1951년 1월5일은 서재필이 세상을 떠난 날이다. 향년 87세. 

서재필은 미국 시민권을 받은 최초의 한국인이었고, 첫 한국인 미국 의사였다. 그는 정부 예산을 얻어 1986년 4월7일 독립신문 창간호를 발행했다.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로 있으며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사설을 맡았고, 국문판 편집과 제작은 주시경이 맡았다.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일간지(처음엔 격일간지)다. 

서재필은 같은해 7월에는 독립협회를 만드는데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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