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16일 새벽 5시 박정희 등 쿠데타군은 중앙방송국(현 KBS 라디오)을 통해 자신들의 ‘혁명 공약’을 알렸다. 실제로 3권(입법·행정·사법)을 전부 장악하진 않았지만 주요 정부기관과 함께 방송국을 점령해 대국민 선전에 나서 마치 모든 권력을 얻은 듯한 착시 효과를 거뒀다. 쿠데타는 곧 주요 권력 기관과 방송사를 접수하는 일이었다. 

참고로 박정희의 쿠데타 당시 쿠데타군의 자칭 ‘혁명 공약’을 읽었던 KBS 아나운서 박종세는 1964년 동양방송(TBC)이 개국하면서 이직했고, 신군부 쿠데타로 언론통폐합이 진행될 때 TBC 고별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TBC가 KBS로 통폐합되면서 KBS로 복귀한 박종세는 군부독재 언론 탄압의 단면이기도 하다. 

TBC는 삼성이 1964년 만든 방송사로 당시 서울 서소문에 위치했다. 삼성은 1965년 신문사 중앙일보도 만들었다. TBC는 1980년 신군부의 언론통폐합으로 KBS에 흡수되면서 사라졌다. 

영화 ‘서울의 봄’이 다루는 12·12 쿠데타 다음날인 1979년 12월13일, TBC 기자 한종범이 회사에 출근해보니 방송사에 상주하던 군인들이 바뀌었다. 영화에서 나오듯 전두환 등 신군부는 북과 대치하던 전방의 군대를 서울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그는 미디어오늘에 “13일 아침에 얼굴은 새까맣고 눈만 반짝반짝한 군인들로 바뀌었는데 전방에서 온 군인들이었다”며 “TBC 한 경영진이 보도국 앞에 왔는데 육군 대위가 ‘누구냐’고 욕을 하면서 따귀를 때리더라”라고 쿠데타 직후 TBC 내부 분위기를 전했다. 

1980년 신군부는 언론사를 통폐합하면서 검열에 항의하며 제작 거부한 언론인들을 내쫓았다. 한종범 기자도 이때 회사에서 쫓겨났다.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나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결과 등을 보면 신군부가 어떻게 언론을 탄압했는지 구체적 내용이 훗날 드러났다. 

21대 국회에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해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에 ‘해직 언론인’을 포함하기로 했고 광주시가 지난 7월부터 올해 말(2023년 12월31일)까지 보상 신청을 받고 있다. 광주시는 12월 중으로 사실조사반, 심사분과위원회, 장해등급판정 분과위원회, 보상심의위원회 등을 꾸리고 내년 1월부터 보상금 지급 심의를 시작할 계획이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는 이번 보상 신청을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TBC에서 해직된 한종범 전 기자가 위원장을 맡았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는 민주화 투쟁, 자유민주언론수호운동, 해직언론인의 원직 복직 등을 목적으로 만든 해직언론인 모임이다. 지난 1984년 3월 만들어 내년이 40주년이다. 

미디어오늘은 지난 6일 서울 종로에서 한종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을 만나 신군부의 언론 탄압과 최근 대책위 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한종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 사진=장슬기 기자
▲한종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 사진=장슬기 기자

 

- ‘서울의 봄’ 영화 봤나?

“봤다. 흥미롭게 구성했더라. 딸이 예매해서 가족들이랑 같이 갔는데 예비 사위가 어찌나 흥분을 하던지(웃음).”

- 영화 속 그날, 1979년 12월12일 밤을 기억하나?

“일상과 다를 것 없이 퇴근했다. 그날 야근을 했다면 더 생생했겠지만 다음날(12월13일) 출근해보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겠더라. 일단 군인이 싹 바뀌었다. 총에 착검을 했고 군복에 비표도 다 바뀌었다. 그전에는 상대적으로 편안한 얼굴들이었는데 13일 아침에 가보니 군인들 얼굴이 새까맣고 눈만 반짝반짝한 사람들로 깔렸다. 한 TBC 경영진이 보도국 바로 옆에 오니까 육군 대위가 ‘누구냐’면서 따귀를 때리는 일도 있었다. (12월12일 야간에) 당직했던 동료들에게 들었는데 군인들이 ‘우리끼리 싸워야 하느냐’며 속삭였다고 하는데 아주 살벌했다고 들었다.”

- 박정희 사망(1979년 10월26일) 이후 계엄이었으니 방송사에 이미 군인이 상주하고 있었고 12·12 쿠데타군으로 바뀌었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방송사는 쿠데타군이 가장 먼저 장악하는 곳이다. 1961년 쿠데타는 방송국이 KBS 밖에 없을 때인데 박정희가 KBS를 점령했다. 새벽에 자고 있던 박종세 아나운서를 속옷 바람으로 끌어내 ‘반공을 제1의 국시로 한다’는 ‘혁명 공약’을 읽게 하면서 장악하지 않았나. TBC도 12·12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 폭풍전야의 조용함이라고 할까나. 얘기도 크게 하지 못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전두환이라는 사람이 주목을 받았고, 전두환이 뭔가 할 거란 얘기는 끊임없이 나왔다. 1979년 12월, 80년 1~2월이 그렇게 흘러가면서 이래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정계와 언론계에서 모두 커졌는데 그게 서울의 봄이다.”

- 10·26 당시 TBC 관련 에피소드도 있을 텐데.

“‘그때 그사람’으로 뜨고 있던 가수 심수봉이 10월26일 TBC 인기 프로그램 ‘쇼쇼쇼’에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갑자기 방송에 오지 않았다. 담당 PD가 알아보니까 그날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 장소인 궁정동 현장에 있었다고 알려졌다. 그래서 궁정동 현장에 여성 가수도 있었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 TBC에선 언제 해직됐나?

“1980년 7월31일이다. 1974년 입사했으니 약 6년 만이다. 해직될 거라는 걸 예상하고 있었다. 그날 골방으로 불려 갔는데 내가 ‘(해직 통보에 대해) 알고 있으니 편하게 얘기하라’고 했다. 다른 언론사도 마찬가지지만 중앙일보·동양방송도 제작 거부 운동에 많이 참여해서 누가 강제 해직 당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분위기였다.”

▲ 1980년 11월30일 TBC 고별방송. 사진=유튜브 'Vintage Archive' 갈무리
▲ 1980년 11월30일 TBC 고별방송. 사진=유튜브 'Vintage Archive' 갈무리

- 해직된 뒤 무슨 일을 했나?

“인사부 직원이 오더니 ‘며칠 뒤 삼성에서 연락이 올 거라고’ 귀띔해주더라. 그때는 누구라도 전두환을 비판하던 시절이었다. 지금처럼 영화 ‘서울의 봄’을 욕하면서 역사를 왜곡하는 사람을 못 봤다. 정말 삼성에서 연락이 왔고 제일모직 홍보과장으로 일하게 됐다. 며칠 전까지 저널리즘 고민하다가 다른 일을 하려니 적응도 안 돼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전두환 덕에 유학도 가보고(웃음). 석사 학위를 받고 나니 중앙일보에서 연락이 왔다. 경제 주간지를 만들 건데 조용히 한국에 들어오라고 했다. 1984년 4월1일 돌아와서 다음날 출근했더니 사장이 바로 인사 발령을 냈다. 이걸 안기부(현 국가정보원)가 나중에 알고서 난리가 났다.”

- 동료들도 해직이 부당하다고 생각해서 배려해준 건가. 안기부 몰래 복직도 시키고.

“그렇다. TBC는 KBS로 흡수통합돼 없어졌고, 중앙일보로 복직했다. (해직) 동료들보다 조금 일찍 언론계로 복귀했다. 1997년, 나이 50세까지 다니다가 동아방송예술대학으로 갔다. 그때부터 안성에 자리잡고 지금은 농사짓는다.”

- 영화 ‘서울의 봄’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최근 영화를 계기로 젊은 분들도 현대사에 관심이 높아졌다. 전두환의 하나회라는 사조직과 현재 검찰 조직을 비교하며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칼럼이 나온다. 마땅히 나와야 할 칼럼이지만 여기에 더해 그때 군부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조명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 직업의식으로 최선을 다하다 쫓겨난 언론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나는 복직해서 그래도 잘 살았지만 훨씬 고생한 해직 언론인이 많다. 언론도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그분들이 어떤 일을 당했고 그 이후 43년간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 80년 해직 언론인들에 대한 보상 신청을 위한 ‘대책위원장’을 맡았다.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를 이끌어 온 분들, 한겨레 가서 고생한 분들이 많다. 나는 딴짓하다가 왔는데 광주시에 보상 신청 기한이 올해 12월 말까지로 얼마 남지 않아 나도 나섰다.” 
  
- 80년 해직언론인은 몇 명 정도 되나?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김대중·김영삼과 가깝거나 제작 거부 등을 이유로 해직한 언론인을 256명으로 발표했고, 보안사 자료에는 711명이 나온다. 자료마다 인원이 다르다. 사실 1980년 12월 언론사들을 통폐합하면서 강제 해직당한 사람을 포함하면 2000명이 넘는다. 40년이 넘어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지금 연락이 닿는 분들은 대부분 서울에 있는 언론사 출신이다. 80년 당시 광주·전남 쪽에 언론인들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상당수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

▲한종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 사진=장슬기 기자
▲한종범 80년해직언론인협의회 대책위원장. 사진=장슬기 기자

 

- 5·18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에 해직 언론인이 포함된 걸 모르는 분들도 있을 거고, 알지만 신청을 망설이는 분들도 있을 것 같다. 광주시가 아직 보상 대상과 액수 등 구체적 기준을 마련하지 않아 비판도 있는데.

“기한이 다가오고 있어서 일단 신청부터 해놔야 한다. 80년 언론인 해직은 국가 폭력이다. 당시 언론인에게 ‘국가관을 보겠다’며 일괄 사표를 받는 곳도 있었다. 이유가 어떻든 국가 폭력으로 벌어진 희생이기 때문에 반드시 명예 회복이 필요하다. 또 80해직언론인에 대한 보상은 앞으로 박정희 정권 시절 해직 언론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이기도 하다. 80년에는 노태우 친필 사인이 들어간 (언론 통제 등) 보안사 문건이 나왔지만 70년대 동아투위·조선투위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언론사 경영진이 깡패들을 동원해 언론인을 탄압하고 해고했을 뿐 박정희 정권 개입의 직접적 물증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 일을 계기로 동아투위·조선투위 명예회복도 적극 논의해야 한다.” 

- 최근 언론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많이 떨어지고 언론계를 보는 시선도 좋지 않다. 현직 언론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1970~1980년대엔 언론계가 지금처럼 진보·보수로 갈라지지 않았다. 민주화라는 큰 목표를 놓고 누가 더 용기있게 기사를 쓰느냐 아니냐 차이는 있었지만 큰 뜻은 다 같았다. 그런데 1987년 6·29 선언(직선제 개헌) 이후 큰 목표가 사라지면서 두 가지 현상이 벌어진다. 하나가 자사 이기주의 심화, 또 다른 하나가 이념의 분화다. 이념이 현실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 상당수가 자사 이기주의를 이유로 인위적 분화가 이뤄졌다. 이는 언론 기본을 지키지 않을 요소가 다분히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기사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할 게 ‘내가 가치있다고 생각해서 기사를 썼고, 이 정도 분량으로 썼는지’다. 1차 게이트키퍼는 기자 본인이다. 자사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이념이라는 인위적 색을 깔면 일부 사실로 독자와 시청자를 호도하게 된다. 사실 위주로 기사를 쓰고, 스스로 그 뉴스 가치를 평가해 납득이 되는 기사를 쓰고 있는지, 이 두 가지를 지켜나가면 언론이 다시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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