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완수 전 경향신문 기자. ⓒ정철운 기자
▲표완수 전 경향신문 기자. ⓒ정철운 기자

최근 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한 표완수 전 경향신문 기자(76)의 감회는 남달랐다. 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취재기자였던 그는 ‘전두광’에 의해 삶이 뒤바뀐 이들 중 한 명이다. “그날따라 서울은 이상하게 안개가 자욱했다. 막히는 길이 아닌데 영 차가 막혀서 회사 근처에서 자고 간 친구들이 많았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활극이 벌어졌던 밤이었다.” 지난 4일 경향신문 사옥 근처에서 만난 그가 44년 전을 떠올렸다. 언론사에 대검 꽂은 계엄군이 서 있던 시절이다. 

12월13일. 국방부 출입 기자가 탄흔이 선명했던 살벌한 현장을 편집국에 전해줬지만, 제대로 된 취재나 기사는 불가능했다. “10·26 계엄령으로 서울시청에 언론검열단이 설치됐다. 소령이 단장, 대위나 중위가 검열관이었다. 하지만 검열을 실질적으로 좌지우지한 자는 보안사령부 준위였다. 보안사 세상이었다.”

표완수 전 기자는 “12‧12 사태 이후 검열이 강화됐다”고 회상했다. “이듬해 서울의 봄, 서울대생들이 서울역 시위에서 보도블록을 깨 투석하고 경찰은 진압봉을 휘둘렀다. 그런데 진압봉 사진은 빼고 투석 사진만 실으라고 했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검열관이 선별한 기사로 조판 작업 뒤 납 활자 위 먹칠로 찍은 대장을 가져가 또 검열받았다. 이중검열이었다. 신문은 완전히 편향적이었다.” 신군부는 운동권 학생들 수배 사진(머그샷)을 사회면에 실으라고도 요구했다. 검열은 전방위적이었다. “해외 보도는 중앙정보부에서 한국 부분만 오려내거나 지워버린 채 내보냈다. 국제부 기자를 오래 한 덕분에, 미 대사관 도서관에 가서 (해외 보도를) 카피해 동료들과 볼 수 있었다.”

▲영화 '서울의 봄' 예고편 갈무리.
▲영화 '서울의 봄' 예고편 갈무리.

1980년 보도 통제에 일부 기자들은 저항했다. 표완수 기자도 그해 3월 기자협회 경향신문지회 보도자유분과위원장을 맡아 검열 거부 운동에 나섰다. 경향신문‧중앙일보‧합동통신(현 연합뉴스) 정도가 주도했다. 그러나 그해 5·17조치로 계엄령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봄은 오지 않았다. “광주 주재기자가 광주를 취재해 올려도 편집국 간부 선에서 쉬쉬하고 끝났다. 평기자들은 광주 상황을 알지도 못했다. 광주 사태는 계엄사 발표 이외에 보도하면 처벌받는다고 못을 박았다. AFP 등 외신 보도를 통해 참혹한 광주를 확인하고 너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기사를 못 쓰게 해 제작 거부를 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봄’을 고대했던 표완수 기자는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여관 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해 6월8일 집에 들어간 그는, 바로 다음 날 새벽 5시 남영동에 끌려갔다. “책상, 의자, 야전 침대, 욕조가 있었다. 처음엔 표 선생 그러면서 온갖 얘기를 하더니, 고려연방제에 대해 들어봤냐고 하더라. 두 명이 번갈아 가면서 밤새도록 같은 걸 묻고 쓰라고 했다. 잠을 못 자 정신이 멍할 때, ‘야 이 새끼야’ 하더니 ‘옷 벗어’, 군홧발로 밟더라. 결국 듣지도 않은 걸 들었다고 했다.” 그는 반공법‧계엄포고령 등 위반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80년 해직 기자가 되었다. 1987년 민주화 전까지 신군부에 의해 언론사 취업은 불가능했다. 

표완수 전 기자는 영화 <서울의 봄> 흥행에 주목했다. “총과 칼이 없어도 똑같은 사회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옛날 하나회가 했던 걸 윤석열 검찰 인맥들이 하고 있다.” 1979년을 보며 2023년에 분노하는 이들이 극장으로 향하고 있다. 그는 야만의 5공 시절에도, 신군부 보도지침에 맞서 싸웠던 기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시민들이 기억해주길 바라고 있다. 표완수 기자는 훗날 <시사저널> 창간 주역으로 활동했고, YTN 대표이사와 시사IN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최근엔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3년 임기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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