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 봄' 예고편 갈무리.
▲영화 '서울의 봄' 예고편 갈무리.

“순박하고 강직한 군인상을 느꼈음”(○○통신 사장 박○○), “난국수습을 위해 노력하는 고애를 감지”(○○통신 사장 김○○), “추후 정국 수습을 기대할만한 훌륭한 장군”(○○방송 사장 최○○), “오로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전형적인 군인상”(○○신문 사장 김○○)….

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눈앞에 둔 가운데,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 장악을 가능케 했던 언론 장악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언론계는 ‘기나긴 겨울’이었다. 당시 보안사에서 작성한 ‘K-공작계획’ 문건을 보면 신군부는 ‘오도된 민주화 여론을 언론계를 통해 안정세로 전환’을 목표로 했다. 신군부는 ‘서울의 봄’을 막기 위한 도구로 언론을 철저히 이용했다. 신군부는 보안사와 언론사주 및 언론사 간부 면담을 추진했고, 당시 언론반에서 작성한 ‘사령관님 언론인 면담 반응 보고’ 내용 일부가 위와 같았다. 

1980년 보안사는 신문·방송 주필 9명, 논설위원 63명 등 72명을 접촉해 ‘순화’를 유도했다. 경향신문 기자 출신 윤덕한은 “광주에서 유혈극이 절정에 달하고 있던 5월23일 전두환은 언론사 발행인들을 불러 언론계 협조를 요청했고 사회부장들을 요정으로 불러내 똑같은 당부를 하고 1인당 100만원씩 촌지를 돌렸다. 당시 중앙일간지 부장급 월급이 45만원 내외였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박정희 사망 다음 날인 1979년 10월27일 전국 계엄령 선포 이후 1981년 1월25일 계엄령 해제까지 1년3개월간 계엄사령부는 보도처 산하에 보도 검열과를 설치하고 총 108만3696건의 신문 방송 통신 잡지 기사를 사전 검열했다. 1980년 4월 ‘서울의 봄’ 시기 검열 건수가 가장 많았다. 검열 대상 중에는 ‘청와대 간부 술집서 행패’(CBS) 기사도 있었다. 전두환은 ‘보도처 위반 시 폐간’이라 경고했다.

▲영화 '서울의 봄'에 등장하는 전두광. 
▲영화 '서울의 봄'에 등장하는 전두광. 
▲1980년 5월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검열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모습. ⓒ한국일보 40년사 
▲1980년 5월 한국일보 기자들이 편집국에서 검열 철폐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는 모습. ⓒ한국일보 40년사 

핵심은 보도지침이었다. 1981년 문공부는 홍보조정실을 만들어 언론사 보도를 분석했다. 보도지침은 홍보조정실의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이었다. 특정사안이 있으면 △가(보도해도 좋음) △불가(보도하면 안 됨) △절대 불가(보도하면 절대 안 됨)로 지침을 내렸다. 1986년 보도지침을 폭로한 김주언 전 한국일보 기자는 “전두환 통치 기간 동안 신문방송의 편집국장·보도국장 노릇은 사실상 청와대와 안기부, 문공부의 2급 국장급이 도맡아 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보도지침 중에는 전두환 방미 중 ‘비행기 내에 목민심서가 꽂혀 있더라’는 사실을 보도하도록 지시하는 내용도 있었다. 1980년 5월16일자 검열지침을 보면 △학생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지지하는 기사는 모두 불가 △학생 구호 중 ‘반공정신 이상 없다’ 등은 기사화 불가 △시위 현장 나왔던 일부 학생들 교통 정리했다는 내용 기사화 불가 등이 담겨있었다. 중앙일보가 1980년 5월7일자 게재 예정이던 ‘탁경명 기자 구타사건’ 기사를 금지당한 뒤 예정 지면을 백지상태로 발간하자, 이후엔 백지면 노출도 금지됐다. 전두환 시절 보도지침을 내린 문공부 홍보조정실 직원 중 언론계 출신은 17명이나 되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1~2월 보안사에 정보처를 복원하고 2월1일부터 정보처 내 언론업무를 담당하는 언론계를 두고 언론반을 가동했다. 언론반에선 언론사 간부 성향을 파악하고 요원들은 언론 동향을 파악하고 언론 논조까지 분석했다. 이 같은 내용의 동향 보고서는 언론인 강제 해직에 참고자료로 활용됐다. 정부의 엠바고나 보도지침을 지키지 않을 경우엔 안기부로 연행해 고문했다. 영장 없는 불법 연행도 반복했다. 보도지침 위반에 대한 보복을 넘어 취재원을 밝혀내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했다.  

조선일보는 1983년 3월22일자에서 김일성 사진을 실었다가 안병훈 편집국장, 유건호 부사장 등 5명이 안기부에 끌려가 사진 출처와 게재 경위 등을 추궁받았다. 동아일보 이도성 기자는 1984년 1월7일자 1면 기사로 북한이 남·북·미 3자회담 제의를 했다고 보도한 뒤 안기부에 연행됐다. 1985년 2.12 총선 이후 동아일보 이채주 편집국장과 이상하 정치부장도 안기부에 연행됐다. 노신영 안기부장이 총리에 임명될 것이라는 보도가 문제였다. 당시 이채주 편집국장은 “(안기부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위협조로 쏟아냈다. ‘우리 부장이 총리에 임명된다는 보도는 총리 임명을 방해하기 위한 고의적 보도가 아니냐’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보안사는 계엄 해제를 앞두고 ‘문제 언론인 순화계획’을 작성하고 전현직 언론인 중 계엄 해제 시 반정부 성향이 예상되는 자를 A급, B급으로 구분하고 A급 1주 1회, B급 2주 1회 접촉해 순화하도록 계획했다. 보안사는 계엄 당시 검열된 기사가 계엄 해제 이후 보도되는 일을 막고자 언론사에 각서를 요구하기도 했다. 

▲1980년 12월25일 언론사 사주들이 보안사의 강압으로 언론통폐합에 동의한 친필각서. ⓒ기자협회 30년사
▲1980년 12월25일 언론사 사주들이 보안사의 강압으로 언론통폐합에 동의한 친필각서. ⓒ기자협회 30년사

전두환의 언론탄압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큰 사건은 80년 언론통폐합이다. 1980년 전두환 신군부는 ‘사회정화’를 명목으로 언론사 통폐합에 나섰다. 전국 64개 언론사가 통폐합되며 18개로 줄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인 1000여명 이상이 강제 해고됐다. 80해직언론인협의회에 따르면 당시 검열과 제작 거부 투쟁으로 해직된 사람은 230여명이다. 지역지의 경우 1도1사 원칙으로 통폐합 또는 페간됐다. 같은 해 주간지와 월간지 등 172종의 정기간행물을 폐간시켰다. <기자협회보> <창작과 비평>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언론통폐합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으로 도쿄 특파원을 지낸 허문도가 주축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통폐합으로 동아방송(DBS)과 동양방송(TBC)이 KBS로 흡수됐다. 방송의 공익성 확보를 이유로 KBS가 MBC 주식의 70%를 인수했다. KBS가 MBC와 연합통신 주식 중 지배적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기존 정부기관지였던 서울신문과 함께 신문 방송 통신의 관영언론체제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CBS는 보도 기능이 박탈됐다. 

▲KBS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땡전뉴스를 확인할 수 있다.
▲KBS '역사저널 그날'의 한 장면. 땡전뉴스를 확인할 수 있다.

전두환 신군부는 방송위원회(오늘날 방송통신위원회), 한국방송광고공사, 한국언론연구원(오늘날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중재위원회, 방송심의위원회(오늘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등 법정 언론 유관 기관을 설립, 행정적 통제 및 지원체제를 마련했다. 이 체제는 2024년을 앞둔 오늘날까지 4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1980년 제정된 언론기본법은 신군부 언론통제를 위한 ‘악법’으로 활용했다. 한국기자협회는 1984년 주택조합을 구성, 문공부와 건설부 도움을 받아 강남구 일원동에 802가구의 ‘기자아파트’를 세웠다. 신군부에 협조한 언론인들을 위한 일종의 ‘선물’이었다. 

*참고=김주언 저, <한국의 언론통제>, 리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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