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잠’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누가 예상했을까. 올해 손익분기점을 넘긴 한국 영화가 마동석 주연의 ‘범죄도시3’, 김혜수·염정아 주연의 ‘밀수’에 이어 신인 유재선 감독이 연출한 데뷔작 ‘잠’으로 이어질 거라고. 개봉 11일째 82만 명을 넘어서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는 소실을 알린 영화는 100만 관객까지 돌파했다. 해묵은 위기설을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계에 찾아온, 기분 좋은 이변이다.

▲ 영화 '잠' 포스터
▲ 영화 '잠' 포스터

‘잠’의 흥행에는 몇 가지 눈여겨볼 만한 요소가 있다. 먼저 50억 원을 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상대적으로 착한 제작비다. 그간 누가 더 많이 쓸 수 있는지 경쟁이라도 하듯 한 영화에 200~300억 원대를 투자해 온 배급사들이 연이어 뼈아픈 흥행 실패를 맛본 걸 돌이키면, ‘잠’은 1/5에 불과한 규모로 알짜배기 흥행 기록을 써 내려가는 셈이다.

제작비가 적다고 영화의 품질이 떨어지는 건 결코 아니다. 작품이 보여주려는 세계가 명확하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다. ‘잠’의 경우 공간을 영리하게 활용했다. 수면 이상증세에 시달리는 남편 현수(이선균)와 밤마다 그 증세를 불안하게 지켜보는 아내 수진(정유미)의 이야기인 만큼, 주된 불안감이 조성되는 공간은 두 사람의 아파트다. 불필요한 외부 공간 노출은 최소화했다.

▲ 영화 '잠' 스틸컷
▲ 영화 '잠' 스틸컷

영화 제작에서는 새로운 공간이 등장할 때마다 세트를 지어 올리거나 로케이션(현장) 촬영에 따른 사전 허가, 현장 통제 등을 고려해야 하는 만큼 비용이 급증한다. 이런 점을 두고 볼 때 대부분의 촬영을 부부의 아파트, 계단, 1층 분리수거장 등을 활용한 ‘잠’의 선택은 지혜롭다. 심지어 무당 해궁할매마저도 집으로 불러들인다. 수면 클리닉, 정신병원 등 필수적인 외부 공간은 ‘그 곳에 갔다’ 정도의 서사 정보를 담아낼 수 있을 정도로만 짧게 치고 빠진다.

‘잠’의 흥행 배경에는 스릴러 장르에 맞아떨어지는 세련된 연출도 큰 영향을 미친다. 불편할 정도로 노골적인 자극이나 깜짝 놀라게 하는 1차원적인 공포 유발 때문에 장르 영화를 기피하는 관객이 꽤 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점을 과감히 소거한 ‘잠’의 용기는 칭찬할 만하다. 대신 다 큰 남편이 집 안에 오줌을 갈기는 장면 뒤에 비 내리는 창문 신을 이어 붙여 앞 장면의 불쾌함을 교묘하게 지속하는 방식을 택한다.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에서 시체를 보여준 뒤 박두만(송강호)이 핏물 흥건한 고기를 굽는 장면을 연이어 보여줬던 류의 방식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잠’의 매력은 무엇보다 감독이 하고자 하는 말이 명확하다는 점이다. 관객이 모든 종류의 불안감과 공포감을 즐기고 난 뒤에는, ‘부부란 게 대체 뭘까’하는 생각할 거리를 품고 집에 돌아가게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남편 현수가 보여주는 ‘연기’가 그렇다. 이 장면이 연기인지 실제인지는 관객에 따라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수면 클리닉과 양약 등 줄곧 이성의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던 남편 현수의 성향을 생각하면 ‘윗집 할아버지 귀신에 씌어 그렇다’고 믿는 아내의 신경증적 강박을 해소해 주기 위해 두 눈 꾹 감고 연기를 펼쳤다고 해석할 여지도 충분한 대목이다. 그의 직업이 배우라는 초반의 ‘떡밥’ 역시 이 대목에서 회수될 수 있다.

▲ 영화 '잠' 스틸컷
▲ 영화 '잠' 스틸컷

효율적인 제작비, 장르에 특화된 세련된 연출과 그에 따르는 재미, 감독 자신이 전하려는 명료한 메시지까지. 3박자를 두루 갖춘 매끄러운 작품이 ‘잠’이다. 모처럼 추천할 만한 한국 영화이자 기분 좋은 데뷔작인 이 작품을 더 많은 관객이 즐길 수 있길 바란다. 관객의 지지와 성원이 모여 가능성 있는 신인의 다음 행보를 든든히 뒷받침할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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