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에도, 이변 없이 4편의 한국영화 대작이 개봉했다. 영화계에서는 통상 8월 첫 주를 전후로 매출액이 최고점을 찍는다고 봐 왔다. 7월26일 개봉한 ‘밀수’, 8월2일 개봉한 ‘더 문’과 ‘비공식 작전’, 8월9일 개봉한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덩어리처럼 뭉쳐 있는 것도 그래서다. 1주일 간격으로 빽빽하게 모여서 파이를 다 같이 나눠 먹을지언정 200~300억 원 대의 큰 제작비를 들인 작품의 회수 가능성을 고려하면 어찌 됐든 ‘큰 시장’에 들어오는 게 유리하다는 판단이다.

▲ 영화 '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 영화 '밀수', '더 문', '비공식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 포스터.

이런 판단이 점차 ‘낡은 공식’으로 변하고 있다. 지난해 여름 시장에서 이미 한 차례 증명된 사실이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더운 날 사람들은 시원한 극장으로 향한다’는 공식이 깨지기 시작했고, ‘여름 시장에 대작을 배치해 큰 매출을 올린다’는 업계의 판단도 더는 작동하지 않았다. 지난해 7월20일 ‘외계+인’, 27일 ‘한산: 용의 출현’, 8월3일 ‘비상선언’, 10일 ‘헌트’가 1주일 간격으로 개봉했지만, 손익분기점을 넘길 수 있었던 건 ‘한산: 용의 출현’과 ‘헌트’ 두 편뿐이었다. 나머지 두 편의 관객은 300억 원 넘는 제작비를 들이고 100~200만 명 모객에 그치며 쓴맛을 봤다.

올해 배급사들은 안일한 악수를 다시 뒀다. 큰 실패를 맛보고도 지난해와 똑같은 방식으로 개봉 일정을 잡았다. 가장 먼저 레이스를 시작한 ‘밀수’가 개봉 2주차 주말(4~6일)을 지나면서 350만 명을 돌파하는 잔잔한 흐름을 탔지만, 시장 분위기는 낙관적으로 볼 만한 상황은 아니다. 지난해 여름 가장 좋은 성적을 낸 ‘한산: 용의 출현’이 개봉 둘째 주에 450만 관객을 넘어선 데 비하면 선두 작품의 모객 폭발력이 크지 않기 때문이다. ‘밀수’는 킬링타임 오락영화로서는 흠잡을 데 없는 만듦새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감독, 배우, 캐릭터 면에서 ‘아는 재미’라는 반응도 적지 않다.

뒤이어 개봉한 ‘더 문’과 ‘비공식 작전’ 상황은 더 심각하다. 200~300억 원 대의 거액 제작비를 투입하고도 사전 예매량이 10만 장을 밑돌면서 개봉 직전까지 관객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했다. 구태여 개봉일을 같은 날로 밀어붙인 CJ ENM과 쇼박스의 고집스러운 선택이 도리어 악효과를 냈다는 업계 목소리가 나오는 가운데, 가장 큰 매출이 일어나야 할 개봉 첫 주말(4~6일)에 앞서 개봉한 ‘밀수’에 밀리며 참담한 성적표를 받아 든 상황이다. ‘더 문’은 주말까지 36만 명, ‘비공식 작전’은 70만 명의 누적 관객을 모으는 데 그쳤다. 100만 명 문턱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 7월 초, 서울 시내 영화관에서 시민들이 영화 티켓을 구매하고 있다. ⓒ 연합뉴스
▲ 7월 초, 서울 시내 영화관에서 시민들이 영화 티켓을 구매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배급 전략만 문제는 아니다. 근본적으론 작품 자체의 약점도 관객의 무관심을 강화하는 형세다. ‘더 문’은 달 뒷면에서 벌어지는 재난 상황을 표현한 VFX 기술력이 나쁘지 않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예상처럼 빈약한 서사와 전형적인 캐릭터가 발목을 잡았다. ‘비공식 작전’은 오락액션영화의 긴장감을 빚어내는 몇 시퀀스가 잘 설계됐음에도 피랍된 외교관을 구출한다는 익숙한 콘셉트와 주연 배우들의 기시감 큰 연기 등 전반적인 요소가 ‘어디서 본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마지막 주자인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입소문을 끌어내긴 했지만 혼자만의 활약으로 움츠러든 여름 시장의 대세를 되돌리기엔 역부족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계의 큰 파이, ‘여름 시장’이 사라지고 있다. 이건 기존의 영화산업계 논리가 전혀 먹히지 않는 새로운 관객의 세상이 이미 도래했다는 의미다. ‘밀수’, ‘더 문’, ‘비공식 작전’,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모두 코로나 이전부터 기획돼 코로나 기간 촬영한 작품인 만큼 ‘여름 시장에서 대박을 노린다’는 그간의 통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난해에 이어 올해 여름까지 시장의 냉담한 반응을 경험한 시점에서는 새로운 결단이 필요해 보인다. 배급사와 제작사는 작품을 기획, 투자, 제작하는 기준을, 극장은 상영관을 문을 열어주던 잣대를 원점에서 재평가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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