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앙!!!’ 마트에서 차를 빼려고 후진하는데 고막을 쨀 것 같은 거나한 경적 소리가 귀를 때린다. ‘뒤에 차가 있으니 조심하시오’ 정도의 경고성 ‘빵’이 아니라, ‘뒤도 안 살피고 운전하는 이 거지 같은 자식아!’ 힐난하는 ‘빠앙!!!’임에 분명하다. 적당히를 모르는 도발에 인상을 팍 쓰고 사이드미러를 살핀다. 얼씨구, 선팅 짙게 한 벤츠 SUV? 돈 좀 있다 이거지? 어떤 재수 없는 놈인지 안 봐도 비디오구먼! 남자는 분노의 풀악셀을 밟는다. 내 인생 지금 참 개 같거든, 너도 맛 좀 봐.

보복성 난폭운전으로 시작해 악다구니와 저주를 핑퐁게임처럼 주고받는 화난 현대인들(스티븐 연, 앨리 웡)의 이야기 ‘성난 사람들’ 이야기다. 지난 4월 넷플릭스에 공개돼 올해 에미상 13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할리우드 작가노조 파업으로 이달 예정됐던 시상식이 내년 1월로 연기되면서 수상 결과는 한참 뒤에나 알 수 있게 됐지만,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를 후보에 올리는 에미상을 ‘사전 점령’하다시피 한 이 드라마의 위력은 충분히 가늠할 만하다.

▲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제공
▲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스틸컷. 사진=넷플릭스 제공

분노. 그건 ‘성난 사람들’을 추동하는 강력한 연료다. 남자 대니 조(스티븐 연)가 추격한 벤츠 SUV는 웬 저택 단지에서 멈춰선다. ‘놈’일 줄 알았던 운전자는 다름 아닌 ‘년’, 에이미(앨리 웡)다. 막힌 변기 뚫고 정원 나뭇가지 쳐내며 생존한 한국계 이민 2세 대니 조 눈에는 ‘아마도 남편을 잘 만나서’ 좋은 차나 몰고 다니는, ‘평생 제대로 된 직업도 없이 살다가 뒤늦게 한가로운 인생 고민이나 하고 있을’ 여자로 보일 게 분명하다. 백날 벌어 철없는 남동생 챙기랴, 노쇠한 부모님 모시랴, 질식할 것 같은 내 심정을 너 같은 배부른 여자가 알기나 해!

그런데 여기서 잠깐. 대니 조만 화가 났을까? 박수 소리도 손뼉이 맞들어야 나는 법. 작은 개인사업체를 운영하는 동양인 에이미는 미국 대형 유통업체와 일생일대의 계약을 앞둔 ‘을’이다. 밤이든 낮이든 생사여탈권을 쥔 백인 ‘갑’의 집에 애완견처럼 쫓아가 각종 비위를 맞추고, 집에 돌아오면 위력적인 시어머니의 핀잔에 시달린다. 속 모르는 이들은 부잣집 도련님을 남편으로 얻었으니 그나마 운 좋은 년이라고 하려나? ‘우리엄마 심기경호’가 제일 중요한 전업주부 남편에 ‘우리아들 아까워’를 연일 눈빛으로 쏘아대는 시어머니 곁에서 본인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스트레스, 늬들이 겪어는 봤어?

생존, 그리고 인정. 성별도, 결혼 여부도, 사회적 입지도, 처한 상황도 달라 보이는 두 주인공의 분노에는 바로 그 공통점이 있다. ‘결국 내가 발버둥 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고 인정받을 수도 없다’는 심리적 극단에 몰려본 적 있는 평범한 수저 출신들이라면, 그 마음 뭔지 알 거다. 당장 아파 쓰러지거나 정신적으로 소진돼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내 부모형제와 배우자, 자식들이 언제까지나 웃으며 날 지지해 줄까?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답을 내리지 못하는 우리들은 결국 매일 아침 일그러진 얼굴로 무정한 생존경쟁에 나선다. 내세울 자그만 무언가라도 손에 거머쥐고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포스터
▲ 넷플릭스 시리즈 '성난 사람들' 포스터

화가 쌓이기 시작하는 건 그래서다. 마음 편히 쉬거나 여유롭게 멈춰 설 수 없어 예민함이 극에 달한다. 누군가 툭 하고 건드리면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 올라오는 울분의 덩어리들이 마른 장작에 불붙듯 와르르 타올라 폭주한다. 그 순간은 어떤 합당한 연유를 지닌 타인의 사정도 내 동정심이나 이해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지경이다. 참지 못하고 경적을 ‘빠앙!!!’ 누르는 것이다. 도로 위에서 대치하는 운전자끼리, 환불을 두고 옥신각신 전화 통화하던 사장과 손님끼리, 댓글 논쟁을 벌이던 익명의 누리꾼끼리, 기어코 서로를 힐난하는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고 만다.

한동안 모종의 ‘빠앙!!!!’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시간을 소모하느라 영화·드라마 업계 사람들이 입이 닳도록 칭찬하던 ‘성난 사람들’을 뒤늦게 시청했다. 그리고 알았다. 그간 왜 불쑥 치밀어 오른 화를 주체하지 못해 몇 번이고 그러지 않았어도 될 일을 키웠던 건지. 서로에게 격분한 대니 조와 에이미가 직장을, 가족을, 삶을 걸고 치고 패는 격전의 장을 펼친 끝에 깨달은 건, 겉보기엔 전혀 다른 서로가 결국에는 같은 종류의 고통에 사무치게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우린 너무 힘들고, 그래서 화가 났다. 상대도 나와 같을 수 있다는 걸 망각한 채 그저 들이받았다. 그 뒤엔? 각자 삶에서 이 무의미한 싸움을 겪어본 자들은 결말을 안다. 드라마 말미 만신창이가 돼 나란히 구조를 기다리게 되는 대니 조와 에이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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