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참사 1주기에 맞춘 한국일보 기획기사가 국장단 수정 지시로 축소됐다는 내부 지적이 제기됐다. 기자들은 뉴스룸국(편집국)의 수직적 구조에서 비롯한 소통 문제가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전국언론노조 한국일보지부(한국일보 노조)가 지난 26일 발행한 소식지에 따르면, 노조 민주언론실천위원회 산하 미래위원회는 지난 18일 한국일보 뉴스룸국 국장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미래위는 입사 만 5년차 이하 저연차 기자들로 구성된 한국일보 사내 기구로 온·오프라인에서 보도 공정성과 언론인 윤리 등을 고민하는 소통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노조 소식지를 보면, 한국일보 사회부 사건팀은 이태원 참사 1주기에 맞춰 1면 전단으로 참사 당시 접수된 112·119 신고 내용을 인포그래픽으로 시각화해 보도하는 방식의 기획안을 준비했다. 그러나 소식지에 따르면, 국장단은 “이태원 기획 인포그래픽을 1면 전면에 걸쳐 싣는 것은 어렵고 1면 일부와 2, 3면 전면에 싣겠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졌다.

▲ 한국일보 30일자 4면과 5면.
▲ 한국일보 30일자 4면과 5면.

담당 기자들은 한 달 가까이 준비하는 기획이 갑자기 변경돼 당혹스럽다는 반응이었고 정부를 직접 비판하는 기획에서 국장단이 부담을 느낀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왔다.

이에 관해 국장단은 △재난 대비 관련 제도적 정비가 돼가고 있는 점 △행정안전부 장관 등에 대한 책임 규명에 관해 헌법재판소가 ‘직을 면할 정도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점 등을 거론하며 수정 지시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일보 30일자 1면에는 한국일보가 실시한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관련 국민 여론조사가 실렸고, 4·5면에 걸쳐 참사 당시 112와 119에 쏟아진 시민들의 구조 호소 메시지가 그래픽으로 처리돼 실렸다.

노조는 “기자들은 이태원 기획 사례가 뉴스룸의 수직적 구조에서 비롯한 소통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지적했다”고 전하며 “국장단과 데스크 결정 과정이 부장, 팀장, 1진 등을 거치며 ‘고쳐라’, ‘보완해서 다시 발제하라’ 등 한 줄의 일방 지시로 단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한국일보의 한 기자는 노조 소식지에 “국장단이 ‘데스크가 기자가 발제한 기사를 쓰지 못하게 한 적 없다’고만 항변할 게 아니라 기자들과 의견 차이를 좁히고 설득하려는 시도를 더 적극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한편, 김영화 한국일보 뉴스룸국장은 ‘중도라는 명목으로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미래위 비판 등에 “지금 한국사회는 양극의 감정이 충돌하고 있는 상황으로 이럴 때일수록 중요한 건 균형 잡힌 스탠스”라며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을 논조의 실종이라 말하는 것은 동의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김 국장은 “현 정권에 부담이 덜 되게 이슈를 다루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며 “그렇다고 기사 내용 없이 말만 지어내거나 제목을 세게 쓰는 것이 좋은 기사인가 하는 우려가 있다. 단순히 우경화라던가, 논조·프레임 등 단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한국사회의 문제들이 많다”고 했다. “비판은 당연히 해야 하지만 감정에 치우친 접근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

김 국장은 소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니어 보드’ 신설을 제안했다. 통상 주니어 보드는 젊은 실무자로 구성된 청년 중역회의를 의미한다. 상향식 의견 표출과 수평적 소통을 통해 참신한 아이디어를 발굴하는 데 목적이 있다. 김 국장은 “현장 저연차 기자들이 언론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한국일보가 타지와 차별화해서 보람찬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뭘까 고민해 보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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