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영을 넘어 공감으로.” CBS 저녁 시사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는 특이하게도 ‘탈(脫) 진영’을 표방한다. 과거 민주당 진영 스피커 김어준을 앞세운 라디오 방송이 독보적 청취율을 기록해온 데서 알 수 있듯 ‘진영 방송’은 시청률과 청취율을 보장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그런 흐름에 역행하는 한판승부는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이재명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진행자 박재홍 앵커(CBS 아나운서)와 고정 출연진이자 부진행자 역할인 김성회 정치연구소 씽크와이 소장, 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가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매력이 있다.

▲ CBS 저녁 시사 프로그램 ‘박재홍의 한판승부’ 포스터.
▲ CBS 저녁 시사 프로그램 ‘박재홍의 한판승부’ 포스터.

“특정 지지층 안심시키는 이야기만 해선 안돼”

지난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만난 진행자 박재홍 앵커는 “우리 방송은 진행자 한 명이 단독 진행을 하고 시사 평론가들이 떼토크하는 식이 아니라 부진행자 콘셉트로 김성회·진중권 두 분이 방송 시작부터 끝까지 함께 하는 특이한 포맷”이라며 “우리 방송이 벌써 2년 넘었는데 청취자들이 이제는 익숙해 하는 것 같다. 세 명이 함께 하니까 내용이 풍성해지고 부족한 점을 서로 채워주는 장점이 있다. 김·진 두 분 생각과 스타일이 다른 것도 우리 프로가 갖는 장점”이라고 말했다.

한판승부의 탈 진영을 가능케 하는 인물은 역시 진중권 교수다. 1990년대 말부터 ‘진보 논객’으로 이름을 알린 그는 2019년 ‘조국 사태’ 당시 진보의 위선을 고발한 지식인이다. 그는 한판승부에서도 할 말은 물론, 못할 말도 다해가며 여·야 부조리를 꼬집는다. 박 앵커는 “조국 사태 이후 진보진영이 분열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팬덤이 더 강화한 면도 있다”며 “제작진은 (진보진영에서 나오는) 다른 목소리를 외면하지 말고 공론장으로 가져오자고 판단한 것 같다. 우리가 진보진영을 지지하는 청취자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진보 지지자들을 안심시키는 이야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밝혔다. 청취율 상승이 더디더라도 “한쪽 지지층만 만족시키는 ‘쉬운 길’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판승부에선 때때로 치열한 설전이 벌어진다. 지난 1월 장예찬 청년재단 이사장이 86운동권 퇴장, 민주노총 해체, ‘가짜보수’ 청산을 걸고 국민의힘 청년 최고위원에 출마하자 진 교수는 “나치 수준의 용어처럼 들린다”며 “노조는 헌법이 보장하는 권리인데 반헌법적 내용을 공약으로 내걸고 젊은 세대를 선동하고 있다”고 질타했다. 장 이사장이 유승민 전 의원과 이준석 전 대표를 ‘가짜보수’로 규정한 뒤 “두 분은 윤석열 정부 지지율이 올라가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다”고 말하자 진 교수는 “본인은 지금 진짜 보수라는 거냐. 궁예인가. 관심법인가. 코미디를 하고 있다”고 비꼬았다.

▲ CBS 저녁 시사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진행자 박재홍 CBS 아나운서가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CBS 저녁 시사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진행자 박재홍 CBS 아나운서가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민주당도 예외는 아니다. 2021년 12월 권인숙 민주당 의원은 한판승부에 출연해 김건희씨의 허위 경력 의혹을 제기하며 “대국민 사기극”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에 진 교수는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들의 허위 스펙과 경력 위조를 결사 옹호했던 민주당의 내로남불 행태를 비판하며 “조국 사태 때 의원님은 비판하셨냐”고 물어 권 의원 말문을 막히게 했다. 김 소장이 “게스트를 불러 앉혀놓고 조국 장관에 무슨 입장이었냐고 따져 묻는 건 인민재판 아니냐”고 항의하는 등 이날 CBS 스튜디오가 한껏 달아올랐다.

박 앵커는 “대선 임박해서 가장 치열했던 것 같다. 특히 대장동 토론이 그랬다”며 “나도, 제작진도 김·진 두 사람 발언을 제지하지 말고 자유롭게 내버려두자는 입장이다. 이견이 드러날수록 그만큼 논쟁적 이슈라는 뜻이고, 국민과 청취자들 사이에서도 여러 논쟁이 있을 수 있으니 진행자로서 한 이슈에서의 갈등 상황을 최대한 드러내는 게 공론장을 위해 필요한 역할”이라고 밝혔다.

“예전에는 손석희 앵커의 촌철살인을 보며 나도 그런 날카로운 모습을 닮고 싶었다. 그러나 한판승부를 진행하면서 과도한 개입은 지양하고 상대방이 충분히 말할 수 있도록 들어주는게 내 스타일이구나 깨달았다. CBS ‘김현정의 뉴스쇼’가 여러 코너가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매우 섬세한 프로그램이라면, 한판승부는 실수가 실수가 아닌 프로그램이고자 한다. 예전에는 원고에 적힌 질문을 주어진 시간 내 어떻게든 다 소화하려 했다면, 지금은 질문을 다 던지지 못하면, 그것대로 여유와 공간이 있겠거니 하고 지나간다. 여러 논쟁이 있지만,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좋았던 건 진행자의 여유와 유머였다. 출연하는 분들이 진행자인 날 보고 덜 긴장하고 덜 경계하게끔 편안함과 여유, 공간감을 드리려고 한다. 프로그램에 유머 요소도 많이 넣으려 한다.(웃음)”

패널 구성에 불만 터뜨리자 “우리가 알아서”

정치권 일각은 한판승부 패널 구성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2022년 1월 당시 김기현 국민의힘 원내대표(현 국민의힘 대표)는 김 소장이 열린민주당 대변인을 맡고 있는 것을 문제 삼고 “여기에 우리 당 대변인이 나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당 입장을 대변하면서 여기서 진행한다? 그건 CBS가 잘못하고 있다”며 “방송이 공정하지 않다. 당장 고쳐달라”고 요구했다.

박 앵커가 “CBS 편성에서 알아서 하겠다”고 하면서 언쟁은 일단락됐지만 정치인이 프로그램 구성에까지 개입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박 앵커는 미디어오늘 인터뷰에서 “우리는 어떤 사안이든 비판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 이슈든,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 이슈든 우리만큼 정파를 따지지 않고 비판한 방송은 없을 것”이라며 “패널 구성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 내용과 프로그램이 다루는 콘텐츠”라고 강조했다.

박 앵커는 “정치 이슈를 다루는 나와 제작진의 일관된 입장은 두 가지다. 하나는 ‘거리두기’이고, 다른 하나는 ‘보여주기’다. CBS 특유의 태도이기도 한데 우리 회사는 정파적 저널리즘에 비판적이다. 정파성을 노골적으로 띠면 팬과 청취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CBS PD들과 기자들은 ‘우리는 그렇게 가지 말자’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전했다.

“일단 정치적 사안에 거리를 두고,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면 판단은 청취자들이 한다. CBS 기자·PD들은 이에 관해 공유하는 공통의 제작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 방향성에 흔들림은 없다. 비록 느리더라도 팬덤과 특정 정파에 기대지 않는 방식으로 성공했을 때 비로소 스스로 떳떳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청취율을 높여가는 타 방송을 볼 때면 ‘우리도 어느 한쪽으로 가야 할까’ 싶지만 그건 훗날 부끄러운 성공이 될 것 같다.”

박재홍, 김성회, 진중권이 한판승부 전부는 아니다. ‘한판 내부자들’은 김규완 CBS 논설위원장, 구용회 논설위원이 한 주의 취재물을 내놓는 코너로 유병호 감사원 사무총장의 전횡과 대장동 재판 이면, 국가정보원 인사 파동 등 굵직한 취재물을 공개하고 있다. 박 앵커는 “기획 의도는 타 시사 프로그램에서는 들을 수 없는 취재물을 가져오는 것”이라며 “두 분은 사실 기자 경력으로 보면, 더 이상 취재하지 않고 편하게 뒤에 계셔도 될 연차다. 그런데 방송에 하나라도 더 넣으려고 생방송 직전까지 취재를 한다. 그 열정이 존경스럽고 감사하다. 두 분도 프로그램 자부심이 강하다”고 전했다. 박 앵커는 “아이템을 놓고 주니어 PD와 논쟁하는 두 선배를 보며 CBS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타사 기자들이 취재와 자료 제공 문의를 많이 해오는데 두 분 모두 으쓱하고 있다”고 말했다.

▲ CBS 저녁 시사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진행자 박재홍 CBS 아나운서가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 CBS 저녁 시사 라디오 ‘박재홍의 한판승부’ 진행자 박재홍 CBS 아나운서가 13일 오후 서울 양천구 목동 CBS 사옥에서 미디어오늘과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김도연 기자.

박 앵커는 2003년 CBS 아나운서로 입사했다. 지난달 31일자로 입사 만 20년이 됐다. 박 앵커는 “신입사원 시절 한 선배가 ‘CBS는 좋은 회사’라고 말한 적 있다. 그땐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라고 되묻기도 했는데 되돌아보면 감사할 따름”이라며 “방송인으로서 많은 기회를 받았다. 무엇보다 외풍에 흔들리지 않는 방송사라는 데서 감사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 박 앵커는 KBS·MBC·YTN 등 방송언론을 겨냥한 정권의 통제와 압력에 우려를 표했다.

‘어젠다 싱킹’ 위한 한판승부의 불편한 질문

“프로그램이나 보도 내용이 잘못됐다면 심의 기구를 통해 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노골적으로 언론에 대고 ‘1급 살인’, ‘사형죄’, ‘국가반역죄’라고 하면 언론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청취자들이 언론이 잘못된 길로 들어설 때 정도(正道)를 찾으라고 꾸짖을 수는 있지만, 언론 비판 대상인 정치인들이 되레 언론을 잡아야 한다고 말하는 게 너무 일상화한 것 아닌가 우려한다. 민주당이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골자로 한 언론중재법 개정에 나섰을 때 국민의힘은 언론노조와 함께 반대 입장을 냈다. 민주당이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킨다는 논리였다. 그랬던 정당과 세력이 집권한 뒤 ‘언론은 24시간 우리 정부 욕만 한다’고 말하고 있다. 방통위원장은 뉴스타파를 겨냥해 ‘처벌이 필요하다’며 언론 자유를 위축시키는 데 분주하다. 여·야 모두 정권만 잡으면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등 언론 이슈를 외면하는데, 언론 현업 종사자들은 혼란스럽고 국민들도 피곤하고 지치는 상황이다. 더는 이래서는 안 된다.”

손석희 앵커는 저널리즘 역할로서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보다 ‘어젠다 키핑’(agenda keeping·의제 지속)을 강조했다. 정보가 빠르게 소비되는 미디어 시장에서 언론사가 해야 할 일은 많은 정보 가운데 중요한 정보를 고르고 이에 대해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박 앵커는 ‘어젠다 싱킹’(agenda thinking)을 강조했다. 그는 “많은 시청자와 청취자들은 자기 생각을 위로받고 안심하기 위해, 기존에 갖고 있던 생각에 확신을 더하기 위해 시사 프로그램을 소비하고 있다”며 “언론이 정파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이 시점에 필요한 건 비판적 사유라고 생각한다. 한 사회 구성원이 어젠다를 비판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게 저널리즘 역할이지 싶다. 한판승부가 그런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시사 프로그램이 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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