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가 송평인 동아일보 논설위원의 <홍범도가 본 홍범도> 칼럼에 대한 반박성 기고글을 보내왔습니다.

미디어오늘은 송평인 논설위원이 칼럼에서 특정하지 않았지만 국내 홍범도 연구자에 대해 “국내 홍범도 연구자는 한두 명에 불과하고 홍범도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먹고산다. 그래서 근거도 불분명한 증언을 토대로 홍범도가 자유시 사변에 땅을 치며 통곡했다느니, 재판위원으로서 억울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노력했다느니 하는 낭설을 늘어놓고 있다”라고 한 대목 등에 대해 홍범도 연구자의 생각을 들어보고 논쟁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기고글을 싣습니다. 윤 교수는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홍범도 장군과 러시아 적군과의 관계, 참변 당시 역할 등을 기술한 ‘홍범도의 러시아 적군 활동과 자유시사변’(2017)이라는 논문을 썼습니다.

윤상원 교수는 사실상 자신의 논문에 있는 내용이 송평인 논설위원의 칼럼에 포함돼 있다면서 “자료를 통해 제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낭설이라고 한 것은 동의할 수 없다. 홍범도 국내 연구자로서 홍범도 장군에 대해 심하게 매도한 글이라고 판단한다”며 글을 보내온 이유를 밝혔습니다.

윤 교수는 송평인 논설위원이 “1932년 홍범도가 소련 정부로부터 연금과 특혜를 받기 위해 제출한 이력서와 소련 정부 측 질문 항목에 맞춰 응답한 앙케트 자료”를 칼럼의 근거로 쓰고 <홍범도가 본 홍범도>라는 제목을 단 것에 대해 자신이 홍범도 장군이라 생각하고 논문 내용을 바탕으로 한 편지 형식의 글을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윤 교수는 “홍범도 장군이 이 글을 읽게되면 어떤 심정일까 하는 생각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고 밝혀왔습니다. - 편집자 주

▲ 9월6일,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 9월6일,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

[관련 칼럼 : 동아일보) 송평인 칼럼-홍범도가 본 홍범도 (2023년 09월 06일)]

 

참 고약한 노릇이외다. ‘홍범도가 본 홍범도’라니… 내 비록 제대로 배우지 못해 이름 석 자나 간신히 쓰고,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아닌 일지나 겨우 몇 자 끄적거리는 수준이오만 왜곡과 분칠로 가득 찬 글을 보고 마음이 심란하여 도무지 가만히 앉아있을 수 없소이다. 그래서 몇 자 적으려 하오.

이른바 민족정론지 동아일보의 논설위원이라고 했지요? 내 들으니 그쪽 세계에서는 그냥 기자라고 불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하더이다. 그래도 칼럼에 논설위원이라고 썼으니 그냥 ‘위원 선생’이라 부르도록 하겠소. 내 살던 원동에서 ‘위원’은 참으로 존경받는 사람들에게만 붙여주는 호칭이었으니 기분 나빠하지는 말길 바라오.

위원 선생이 무슨 자신감으로 이런 글을 썼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소이다. 내가 1932년에 썼다고 하는 이력서와 앙케트를 보지 않고 나에 대해 쓴 역사학자들은 모두 “알량한 지식”으로 “낭설을 늘어놓고” 있는 무뢰한들이라는 것이지요? 그 자료를 본 위원 선생만이 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최고 전문가라는 것이지요? 그런 억지가 어디에 있소?

한 사람의 인생도 역사인데, 어떻게 어느 한 시점에 쓰여진 글 하나로 그 사람의 역사를 두부 자르듯 재단한다는 말이오. 내가 아는 역사학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소. 몇 개 되지도 않는 내가 쓴 글, 내 동지들이 나에 대해 쓴 글, 나의 활동을 유추할 수 있는 여러 단편적인 자료들, 심지어 나의 적인 일제가 추적한 정보 보고들까지 모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나와 내 활동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역사학자들이오. 일제의 자료를 분석하기 위해 일본어를 배우고, 러시아 자료를 읽기 위해 러시아어를 익히는 사람들이오. 

기왕에 역사학자들 얘기가 나왔으니 한 마디 더 하겠소. 위원 선생은 국내에 나에 대한 연구자가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했지요? 참으로 불성실하오. 굳이 많은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소.

국내외에서 발행된 논문들을 제공하는 ‘학술연구정보서비스’에 들어가 그냥 ‘홍범도’를 치면 되오. 문학 등 다른 분야는 빼고 역사학 분야에서만 2000년 이후 제목에 내 이름이 들어가는 논문을 쓴 연구자가 7~8명이오. 정미의병, 대한독립군, 봉오동전투, 자유시참변 등 내 활동과 관련된 논문은 말할 것도 없소. 그래 십분 양보해서 요즘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는 논문을 쓴 두 연구자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 연구자들이 “홍범도가 좋은 평가를 받아야 먹고 산다”고요? 이런 막말이 어디 있소?

한 사람은 대학에서 20여 년간 재직하다 정년퇴임한 명예교수이고, 다른 한 사람은 현재 국립대학교의 교수라오. ‘거대신문사의 논설위원’보다야 훨씬 적은 수입이겠지만, 굳이 나를 연구하지 않아도 ‘먹고 사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학자들이오. 그들의 연구가 비록 완벽한 진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생계를 위해 또는 어떤 목적을 위해 역사적 진실을 비트는 사람들은 아니라오. 

어디선가 본 글이 생각나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 사실과 인물에 대한 판관이 아니다. 개별 역사학자들이 내놓은 연구가 곧바로 역사적 진실을 담보한다고 얘기할 수도 없다. 최종적으로 완벽한 역사적 실체를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다만 역사학자들은 주어진 사료를 토대로 역사적 실체에 최대한 가깝게 접근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물들이 쌓이면 ‘잠정적’인 역사적 진실로 ‘인정’받게 된다. 한편, ‘잠정적’이기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가 언제든지 새로운 연구결과로 대체될 수 있다는데 대해 열려있고자 한다. 그렇게 역사학은 발전해 왔다.” 나에 대한 연구도 마찬가지요.

1932년의 그 자료가 무엇인지 짐작되는 바 없지 않지만, 기억이 희미해 정확히 어떤 자료인지 확신을 못하겠소. 다만 역사학자들이 보지 못했다는 위원 선생의 주장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소. 그러나 사료를 그렇게 이용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오. 이미 30년 전에 거금을 들여 구입했다면서 지금까지 꽁꽁 숨겨놓고 있었소? 그러면서 “너희들은 이 자료 못 봤지, 나는 봤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오? 이런 건 철부지 어린애들이나 하는 짓이라오. 일찍 그 자료들을 공개했더라면, 역사학자들이 그 자료들을 토대로 새로운 연구결과를 도출해낼 수도 있었겠지요. 어쩌면 위원 선생네들이 원하는 그런 결과일 수도 있었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게 하지도 않은 채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알량한 지식”이니 “낭설”이니 말하는 것은 역사학자들에 대한 모욕이오. 

또한 왜 1932년의 그 자료만 맹신하고, 다른 자료들에는 눈을 감는 것이오? 온라인상에 떠돌고 있는 1922년 앙케트는 보지 못한 것이오? 애써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오? 위원 선생이 비난하는 그 역사학자가 발굴해 공개한 자료라오. 내가 모스크바에서 열린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이른바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한 목적을 ‘고려 독립’이라고 쓴 자료 말이오. 나뿐만이 아니라오. 대회에 참가한 52명의 동지 대부분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모스크바에 왔소. 이후 조선공산당의 책임비서가 되는 김재봉 동지도 “조국 독립을 목적하고”라고 썼고,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부주석이 되는 김규식 동지도 “한민족 해방과 세계대동”을 위해 대회에 참석했다오.

▲ 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사진=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홈페이지
▲ 1922년 1월 모스크바 원동민족대표대회에 참석한 홍범도 장군(왼쪽)과 최진동 장군. 사진=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 홈페이지

내가 1922년 앙케트에 ‘고려 독립’을 목적으로 대회에 참석했다고 썼으니, “이것만이 나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다”라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라오. 1922년의 나와 1932년의 나에 대한 자료는 전체의 나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이오. 또한 당대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읽어야 하오. 몇 장인지 알 수 없는 1932년의 자료만으로 나의 일생 전체를 규정하려는 위원 선생의 태도가 얼마나 몰역사적인지를 지적하려는 것뿐이라오.

얘기가 길어졌지만, 위원 선생이 칼럼에서 주장한 내용이 얼마나 왜곡되고, 무지와 억측에 기반해 있는지 말하지 않을 수 없소. 차근차근 읽어봅시다.

위원 선생은 내가 “레닌을 만나러 모스크바에 간 것은 자유시에서 발생한 유혈 사태를 보고하기 위함”이고, 내가 “자유시사변 3개월 전에 한인 여단 제1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니, 나와 나의 부대가 “단순히 무장해제에 응한 것 이상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의심이 가능”하다고 썼지요. 역사학자들의 연구를 좀 더 읽어봤으면 이런 얘기를 못하지요.

내가 제1대대장으로 임명된 것은 자유시에 모인 한인 독립군들을 고려혁명군으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조치라오. 무장해제가 결정된 이유 중 하나는 수라세프카 평야에 있던 대한의용군이 이 재편안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오. 즉, 자유시사변이 일어날 때까지 한인 여단(고려혁명군)은 제대로 편성조차 되지 않았다는 것이오.

나는 자유시에서 유혈 사태를 보고하기 위해 레닌을 만나러 갔소. 유혈 사태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자유시사변으로 체포된 동지들을 즉각 석방하는 것이 옳음을 보고하러 간 것이오. 이후 코민테른의 결정에 내 보고가 반영되었다오. 레닌이 내게 권총을 준 것은 의병 이후 그때까지 독립군 대장으로 싸워온 내 경력을 존중해서이지, 자유시사변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오. 이미 여러 자료와 연구들을 통해 설명이 가능한 나의 이력을 위원 선생 혼자만 ‘의심’하고 있는 것이란 말이오.

위원 선생은 내가 “1919년부터 1920년까지 빨치산 부대를 거느렸다”고 썼으니,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 임할 때 나의 자의식이 “독립군이 아니라 빨치산이었건 것이다”고 썼네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소. 아니 국방부 발표회장에서 위원 선생의 동료 기자들이 국방부를 질타했던 내용을 듣지 못했단 말이요? 당시에는 독립군이 빨치산이었소.

1940년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광복군이 창설되기 전까지 일본군과 싸웠던 독립군 부대는 모두 빨치산이었다오. 빨치산(영어로 파르티잔)은 비정규군을 말하는 것이잖소? 나와 내 부대는 러시아에서는 빨치산으로 불리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의병으로 불리고, 북간도로 왔더니 독립군으로 불렸다오. 이런 가장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니 내가 “독립군이 아니라 빨치산이다”라는 어이없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요.

또 위원 선생은 산포수였던 내가 “현대 무기의 위력을 실감하고 엽총으로는 일본군을 상대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러시아 적군과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보인다”고도 썼더라고요. 그게 아니오. 내가 1919년까지 머무르던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들이 대부분 적군 편에 선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그것은 무기 때문이 아니라, 러시아내전 과정에서 시베리아와 연해주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했기 때문이오. 내전 초기에는 백군 편에 선 한인들도 있었다오. 하지만 일본군의 출병 이후에는 대부분이 적군 편으로 돌아섰소. 당연하지 않겠소? 하지만 위원 선생처럼 이 당연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구려.

위원 선생은 참 잔인하오. “홍범도는 자유시 사변 이후 독립영웅으로 불리기에는 수치스럽게도 다시 총을 잡지 못했다”는 말에 나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소. 미안하오. 그래 나는 자유시사변 이후 다시 총을 잡지 않았소. 연해주에서 동포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오.

그런데 말이오. 내가 1868년 출생인 것은 아시오? 봉오동전투를 치를 때 내 나이가 53세였소. 자유시사변 때는 54세이오. 청산리전투 때 김좌진 동지가 32세, 이범석 동지가 21세였소. 자유시사변 때 고려혁명군의 사령관이었던 칼란다라시빌리가 1876년생으로 나보다 8살이 어리오. 그런데 그의 별명이 ‘제두쉬카(할아버지)’였다오. 50대 중반이 넘어가는 나이에 군문을 떠나 은퇴하는 것이 그렇게 수치스러운 일이란 말이오? 맞소.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되었을 것이오. 죽을 때까지 총을 잡고 싸우던지, 총을 잡고 싸우다 죽던지 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너무나 미안하오.

1937년 강제이주 때도 그랬어야 했소. 이미 70세가 되었지만, 강제이주에 저항해 불만을 토로했어야 했다오. 강제이주를 전후해 스탈린의 탄압을 받았던 한인 희생자가 확인된 것만 해도 6천 명에 이르고, 그중에서 총살된 사람만 2천 8백 명이 넘소. 이것도 위원 선생이 비난한 그 역사학자가 밝혀낸 것이오. 그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강제이주를 70세의 노구를 이끌고 앞장서서 반대해야 했는데, 그러다 총살을 당했어야 마땅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해 미안하오.

▲ 2017년 9월30일, YTN '강제 이주 80년 고려인, 아리랑 고개를 넘다' 보도 갈무리.
▲ 2017년 9월30일, YTN '강제 이주 80년 고려인, 아리랑 고개를 넘다' 보도 갈무리.

위원 선생은 관심법을 가졌나 보오. 내가 “뼛속 깊이 공산주의자”이고, 이미 1919년 무렵부터 자의식 속에서 “새로운 조국은 소련”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하네요. 내 자의식은 언제 들여다보았고, 내 뼛속은 언제 살폈는지 모를 일이오.

내가 1927년에 입당을 했으니 공산주의자인 것은 맞소. 나와 함께 그리고 내가 은퇴한 후에도 일제에 맞서 끊임없이 투쟁했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소련공산당에, 중국공산당에, 심지어는 일본공산당에도 입당을 했소. 이유는 단 하나였소. 그렇게 해야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울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라도 일찍 조국의 해방을 앞당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오.

일제가 우리 땅을 불법적으로 강점하고 있던 시기에 공산주의운동과 조국의 독립은 둘이 아니었소.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는 수많은 지사들이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공산주의운동을 통해 조국을 독립시키려고 청춘을 불살랐소. 이제는 상식이 된 이야기요. 나는 이런 상식을 거부하는 자들이 일제 때 공산주의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했던 고등계 경찰들이나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설립된 간도특설대 출신들만 있는 줄 알았소.

내 비록 은퇴 이후 20년이 넘는 세월을 소련 땅에서 거주하며 소련 공민이 되었지만, 단 한 번도 내 조국을 바꾼 적은 없소. 바꾸려 한다고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오. 나는 연해주에서, 카자흐스탄에서 언제나 우리 동포들과 함께 있었고, 말년에는 고려극장의 극장장 태장춘과 그 동료들의 배려로 동포들 속에서 비교적 안락한 삶을 살았소.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소련 공민이 되었다고 해서 내가 조국을 버렸다고 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모욕을 넘어서는 망설이오.

소련 땅에서 소련 공민으로 살아야 했던 고려인, 중국 땅에서 조선민족의 뿌리를 지키고자 했던 조선족, 국적도 없이 식민모국에서 차별을 견뎌야 했고 자식들을 위해 귀화를 하면서도 끝내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놓지 않았던 일본의 자이니치(在日) 그리고 이제는 750만 명에 달하는 전 세계의 우리 동포들에 대한 모욕이오. 현지의 국민이면서 한민족이라는 이중 정체성 속에서 부유하면서도 역사적 조국과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재외동포들의 노력과 염원을 짓뭉개버리는 무도한 짓이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요. “봉오동-청산리 전투는 무장투쟁의 여명으로 착각한 황혼이었다”고? 위원 선생은 정말 무장투쟁이 봉오동-청산리 전투와 1940년대 광복군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소?

자유시참변 이후 연해주로 돌아온 한인 빨치산들이 일본군을 몰아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사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적기단을 만들어 일제에 저항했던 사실, 1920년대 후반부터 만주에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당군이 조직되어 활동했고 만주사변 이후에는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 및 만주군에 맞서 싸웠다는 사실, 조선혁명군 사령관 양세봉 장군이 ‘상승(常勝)의 명장’으로 불렸던 사실, 만주사변 이후 만주의 한인들이 유격대를 조직하여 동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 등에서 일본군과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 중일전쟁 이후 중국 관내에서 조선의용대가 조직되고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재편되어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사실, 이 모두를 정말 모르는 것이오? 모르는 척 하는 것이오?

해방 때까지 한 시도 쉬지 않았던 한국독립운동의 역사를 모르기 때문에, “나라를 잃은 적이 없고 따라서 건국이 뭔 말이냐”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고언을 “헛소리”로 치부하는 것이겠지요. 그의 조부인 이회영 동지가 다섯 형제들과 함께 전 재산을 털어 서간도로 망명했고, 마침내는 일제 경찰의 고문으로 척추가 부러져 순국했다는 사실을 몰라서 그랬겠지요. 함께 망명한 여섯 형제 중 막내 이시영 동지만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오고,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타지에서 고혼이 되었다는 사실을 몰라서겠지요. 그래서 6형제와 그 자제들 같은 분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라는 광복회장의 질정을 새겨들을 생각이 없는 것이겠지요. 진정 몰라서 그랬다면, 앞으로 배우면 될 텐데… 굳이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오.

▲ 홍범도 장군.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홍범도 장군. 사진=홍범도장군기념사업회 홈페이지

나더러 “지옥에나 꺼지라고 하는 건 아니다”고 하니 고마울 따름이오. 하지만 난 이미 지옥에 있소. 내 비록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였지만, 내 동포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였지만, 수없이 많은 일본 젊은이들을 살생했으니 어찌 천당에서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겠소. 통합을 둘러싼 내홍 속에 많은 동지들이 죽고 다치는 모습을 피눈물을 쏟으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때의 죄책감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소. 새로운 터전이라 생각했던 소련에서 동지들이 숙청되어 하나둘씩 사라져가는 것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을 때의 무력감을 어디에 말할 수 있겠소. 조국 독립을 위한 투쟁 과정에서 죽어간 동지들이 나를 질책하고, 내게 하소연할게 분명한데 어떻게 천당에서 마음 편히 머무를 수 있겠소. 동지들의 질책과 하소연은 그들의 투쟁과 희생 덕분에 ‘독립영웅’이라는 과분한 칭호를 얻은 나를 내리누르는 징벌과도 같은 것이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위원 선생네 같은 이들에게 들어야 할 질책은 아닌 것 같소이다. 내 흉상쯤이야 육사에서, 국방부에서 사라진다고 뭐 그리 큰 대수이겠소. 하지만 그 이유가 위원 선생이 주장하는 것처럼 내가 공산당에 입당했기 때문이라면, 독립운동의 방략으로 공산주의를 택하여 독립운동의 전당에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수많은 동지들과, 또한 그런 공산주의계열 독립운동가들과 연합하여 운동을 전개했던 수많은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동지들을 모욕하는 것이오. 그러니 이제는 그 망설을 멈추기를 바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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