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사옥. 미디어오늘 자료사진
조선일보 노보에 최근 조선일보 정치기사와 사설을 둘러싼 논설위원과 고문 간의 상반된 견해의 글이 실렸다. 그들은 ‘조선일보의 현 위기상황’에 대한 진단과 대처방안을 두고 ‘지면 설전’을 벌였다. 이는 이 신문의 생존전략에 대한 내부 논의의 한 부분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국내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신문조차 내부 위기 상황에 대한 분위기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것은 언론계 전체가 생존문제를 놓고 얼마나 고심하는지를 엿 볼 수 있게 한다. 이 신문이 고민하는 위기상황에 대한 인식의 질이나 범위 등은 다른 매체와 동일하지는 않다. 그러나 고민의 종착역이 생존문제라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수많은 매체의 등장이라는 뉴미디어 시대의 구조변화 속에서 피할 수 없는 언론계 전체의 고민이다. 기존매체에게 경쟁 심화, 수익감소 등 불투명한 경영환경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구언론 조차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미디어의 무한경쟁 시대

조선일보가 겉으로 걱정하면서 대처하고 있는 뉴미디어 시대는 미디어 무한경쟁의 시기다. 방송과 통신의 영역이 무너지는 등 매체 간 특이성도 희박해져 동일한 시장에서 사생결단식 경쟁을 해야 한다. 언론조직체가 살아남아야 하고 거기에 속한 언론인 개개인의 복지도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니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정황이다.

오늘날 정보산업의 덕택으로 새로운 정보전달 수단이 계속 개발, 실용화되면서 매체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머잖아 ‘가지고 다니는 텔레비전’인 DMB시대가 개막된다. 영상으로 전달되는 정보를 아무 때나 접할 수 있다는 것은 미디어의 전체 사회에 영향력이 더 강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같은 뉴미디어 시대에서 미디어와 연결되지 않은 정치, 경제 등을 상상할 수 없다. 미디어는 최상의 권력 위치로 점점 더 부상 중이다.

   
▲ 조선노보 731호 1면 김대중 고문 기고(왼쪽)와 조선노보 729호 1면 김창균 논설위원 기고.
뉴미디어 시대는 기본적으로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민주주의의 철학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수많은 정보 전달매체가 갖가지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토양 때문에 가능하다. 두 개의 이데올로기로 나눠 대립했던 동서냉전시대의 상황에서는 뉴미디어 시대가 개막되기는 어려웠고, 그래서 냉전의 종식과 뉴미디어 시대가 겹쳐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대의 물줄기가 변했지만 우리 대중매체의 일부는 그것을 거부하고 민주화된 정치권력을 물어뜯는 식의 폭력적 언론행태를 지난 수년간 지속했다. 그런 수구언론의 속성은 한반도 평화문제, 국내 과거청산 문제 등에서 확실히 드러났으며 그 폐해는 아직도 계속된다. 오늘날 ‘조동’ 또는 ‘조동문’으로 불리는 이들은 남북문제, 북핵문제 등이 제기되면 대체로 미국 보수진영과 코드 맞추기에 급급하다. 때로는 미국의 보수 언론보다 더 미국적인 그런 논조를 취한다. 수구언론은 국내 정치문제에서는 최강의 권력으로써 군림한지 오래다.

언론이 권력인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권력 행사가 다양성을 전제로 상대를 존중하는 뉴미디어 시대의 공동체 문화에 걸맞지 않다는 점이 문제다. 한때 대통령 만들기에 몰두했던 과거의 체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정치 집단보다 더 정략적이고 편향적인 경우가 적지 않다.

뉴미디어 시대 도래 … 수구언론 내부 '변화의 몸부림' 주목 

수구언론의 이런 보도태도에 대해 우리 언론 소비자들은 점차 등을 돌리고 있는 추세다. 그 정도는 아직 수구 언론에 크게 기울어 있는 신문시장의 판도를 변화시킬 만큼은 아니다. 그렇다 해도 뉴미디어 시대의 미래에 대해 확실한 판단을 내린 쪽은 과감히 방향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그 같은 움직임에는 당연히 내부 진통이 따른다. 조선일보 노보에 공개된 것도 그런 것이다.

‘조중동’에서 이탈한 것으로 되어있는 ‘중’도 변신을 앞서 시도한 케이스다. 나머지 수구언론도 서서히, 보일 듯 말 듯 방향을 트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자신들의 충실한 소비자들이 놀라지 않을 만큼 말이다. 수구 언론이 성공적으로 변신한다면 언론 시장은 여전히 이들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것인가? 그런 미래를 그려보면 기분이 무거워진다.

그렇다면 수구언론의 반대쪽에 있는 미디어들은 변신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나? 이런 의문이 들었을 때 안타까운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진보 성향의 언론매체 일부도 ‘언론 권력증’에 취해 있다는 사실이다. 수구적 공룡 언론과 꽤 닮은 모습이다. 우리 속담에 미워하면서 닮아간다고 했던가?

진보매체들은 한반도 평화통일, 과거사 청산에는 바른 소리를 하다가도 자사(自社) 이익이 걸린 문제에는 철저하게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객관적으로 보아 합리적인 목소리인데도 ‘성깔’을 부리면서 저항하는 모습은 수구언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길게, 넓게 보면 언론 풍토를 정상화하고 진보언론의 영역을 넓히는 확실한 길인데도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수구언론이 속으로 얼마나 쾌재를 부를까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다. 남의 비판은 열심히 하지만, 정작 자기 성찰에 인색하거나 자신의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지 않으면 밝은 미래는 없다.

진보매체도 비이성적 논조에선 뉴미디어 시대 '존재의 가치' 없어

뉴미디어 시대에 살아남을 수 있느냐 하는 생존논리는 어쩌면 단순한 것이 아닐까? 그것은 궁극적으로 언론 개혁을 착착 진행하는 자세로 소비자인 시청자와 독자에게 얼마나 서비스를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 맹목적 자사이기주의만으로는 안 된다. 편향적이고 배타적인, 그래서 소비자에 대한 최대한의 서비스를 고려치 않는 비이성적인 미디어는 뉴미디어 시대에 생존할 수 없다. 뉴미디어 시대의 미디어 이데올로기는 소비자에 대한 무한대의 서비스 정신이다. 그 어느 것도 이것을 앞설 수 없다. 조선일보의 공개적인 변신 움직임을 눈여겨볼 일이다.

   
필자 고승우 박사는 1980년 당시 합동통신(현 연합뉴스) 근무 중 광주민중항쟁 보도와 관련해 제작거부운동을 펼치다 강제해직 당한 뒤 ‘말’지 편집장을 역임하고, 한겨레신문 창간작업에 참여해 민권사회부장, 출판부국장, 한성대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현재 80년 해직언론인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겨레 창간과 언론민주화' '5·6공 언론비판서' '기자 똑바로 해야지' '언론유감' 'TV와 인터넷에서 우리 아이 지키기' '논리로 떠나는 통일여행' '반핵과 미술' '분단을 넘어 통일을 향해' 등이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