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완기/본지 객원칼럼니스트·MBC 제작본부장
지상파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의 사업자 신청접수가 지난 14일 마감되었다. 6개 사업자의 허가추천을 앞둔 방송계에는, '과거 경험해보지 못한 이동서비스'라는 기대 섞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펼쳐질 방송환경에 대한 우려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사업자들 간의 경쟁이 과열 양상을 보이고 있을 뿐 아니라, '돈의 힘'이 방송의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를 뛰어 넘으려 하기 때문이다.

방송이념이 전혀 다른 사업자들 간에 양해각서와 컨소시엄이 체결되고, 그 컨소시엄과 또 다른 컨소시엄이 다시 통합하는 등, 세 불리기 차원의 무원칙한 합종연횡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예비 사업자들은 사업의지를 과시하기 위해, 내용보다 겉포장에 초점을 둔 오십소백(五十笑百)의 전시행사를 하루가 멀다 하고 연다. 행사의 주체들은 행사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관련 장관을 비롯한 영향력 있는 인사 모시기에 급급하고, 언론은 이들이 뿌린 보도 자료를 받아쓰기 바쁘다. 예비 사업자들이 주최하는 토론회와 세미나는 대부분 동어반복의 DMB 예찬론이나, 홍보성 발언, 아전인수식 주장 등으로 가득 차 있다.

너무 다른 매체간의 이상한 짝짓기에 대기업 자회사 우회진입 시도도

한편, 지상파DMB의 국가기술표준 선정에 깊이 개입했던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사내 벤처기업이 사업권 따기 경쟁에 뛰어드는가 하면, 지상파방송 사업이 금지되어 있는 대기업이 자회사를 내세워 진입을 시도하려는 모습도 보인다.

   
▲ 지난 14일로 지상파DMB 사업자 공모 접수가 마감됐다. 사진은 지난해 12월15일 코엑스에서 열린 DMB Expo 2004에서 삼성전자 도우미가 위성DMB폰(왼쪽)과 지상파DMB폰을 선보이고 있는 장면.ⓒ연합뉴스
일부 예비사업자들은 이행 불가능한 공약(空約)들로 사업계획서를 터무니없이 부풀렸다는 소식도 들린다. 나중에야 어떻게 되든 우선 허가를 받고 보자는 심사가 작용했을 터이다. 'DMB'라는 용어만 들어가면 주가가 치솟는 현상이 벌어지는 가운데, 주식의 시세차익을 노리고 이를 부채질하는 징후도 엿보인다. 일부 예비 사업자들은 몇 차례 증자를 거듭하면서 주식을 할증 발행했다는 기사가 보도되는 등 참여 기업의 도덕성에 심각한 문제들이 노출되고 있다.

방송에 대한 철학과 사회적 역할에 대한 담론은 없고, 컨소시엄 구성, 코스닥 상장, 주가상승 등 자본과 산업의 논리만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가 지배하는 한, 견고한 방송철학과 방송에 대한 애정으로 오래 전부터 내실 있게 준비해왔던 진정한 방송사업자는 추천과정에서 탈락하기 십상이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이러한 현상은 다매체 다채널 시대의 방송환경을 상업주의와 선정주의로 물들일 공산이 크다.

마지막 게이트키퍼 방송위의 역할

이러한 상황에서, 방송위원회가 제시한 사업자 추천 심사기준은 방송의 공적 책임과 공정성, 공익성 실현을 최우선 가치로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한적인 상업주의로 혼탁해질 미래의 방송환경을 극복하기에는 미흡하다는 느낌이다.

심사기준에서 재정 능력, 자금조달, 방송시설 구축, 방송발전 지원 등 주로 자본력과 관련된 항목들에는 전체의 40%라는 높은 비율의 점수를 부여한 반면에, 사회적, 문화적 필요성에는 4%라는 극히 미미한 배점을 할당한 것은 '돈의 힘'에 의해 지배되기 쉬운 방송환경을 지향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물론 방송시설을 구축하고 운영하는 데는 일정 수준의 자본력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무상으로 부여받은 공공의 전파가 자본의 힘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되는 현상은 애초의 지상파DMB 도입취지와는 거리가 멀다.

채널수에 대한 규정은 있지만 콘텐츠의 질에 대한 규정이 없는 것도 문제다. 채널의 수와 콘텐츠의 질은 반비례한다는 점에서 콘텐츠의 질적 기준을 규정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며 이 또한 심사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사항이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우리 속담처럼 채널 효율성을 높인다는 명목으로 과다한 채널을 통해 저급한 영상과 음질을 시청자들에게 강요하는 상업주의를 경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심사과정에서 과대 포장된 사업계획서를 걸러내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며칠간의 심사과정에서 이를 검증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사업자 선정 이후에도 사업계획서의 이행여부를 철저하게 검증하고 이에 미치지 못하는 사업자에 대해서는 허가취소나 재허가 불허를 포함한 확실한 제재를 취할 수 있도록 구속력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지난해 지상파TV 재허가 과정에서 이익금의 사회 환원약속을 위반한 방송사의 사례를 발견하고도 법적 장치의 미비로 구속력 있는 조치를 취하지 못했던 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지상파DMB의 사업자 선정에서 무엇보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선택의 기준에서 방송에 대한 철학과 콘텐츠 공급에 대한 의지가 자본의 논리에 앞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송위원회가 방송사 프로젝트에 관여했던 학자들을 심사위원 범주에서 배제한 것은 일단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돈의 힘에 포박되어 방송사가 아닌 일반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맞춤형 학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는 점에서 심사위원 배제의 범위는 더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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