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일 KBS 한 영상카메라맨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이후 전국언론노조 KBS본부(위원장 진종철·이하 KBS노조)가 진상조사와 대책마련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파문이 일고 있다. 특히 이번 사건은 KBS가 주5일제를 시행한 지 8개월이 지나고 있지만 근무여건이나 인력 충원, 대체휴가 등과 관련한 제반 여건이 여전히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어서 향후 노사간 쟁점이 일 전망이다. 

드라마영상팀 이주림씨 사망, 노조 진상조사단 구성

사건이 발생한 것은 지난달 31일 KBS 드라마 <바람꽃>을 촬영하고 있는 이주림씨(드라마영상팀)가 두통을 호소하면서부터다. 이씨는 이후에도 계속 고통을 호소하다가 지난 3일 휴가를 내고 광주 자택으로 내려갔으나 다음날인 4일 새벽 2시 30분 경,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이후 이씨는 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돼 1시간 동안 심폐 소생술 등 응급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사망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KBS노조는 진상조사단을 구성, 이씨가 숨지기 직전 한달 동안 144시간 33분의 초과근로를 했다고 밝혔다. KBS 노조측은 "고인은 숨지기 직전까지 하루 평균 15시간 노동을 했다"면서 "이는 시간외근무는 주당 12시간, 한달 동안 5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것"이라며 대책마련을 촉구하고 나섰다.

특히 KBS노조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제작본부장의 책임론을 거론하며 재발방지 마련을 요구 향후 노사간 뜨거운 쟁점이 제기될 전망이다. KBS노조는 14일 발표한 성명에서 "정연주 사장과 경영진은 강제 퇴출을 말하기에 앞서 직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현실을 직시하고 하루빨리 개선책을 마련하는데 한 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면서 "고 이주림 사우가 사망에 이르기까지 살인적인 노동 현장을 방치해온 제작본부장에게 명백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KBS노조가 발표한 성명서 전문이다.

철저한 진상조사와 대책마련을 촉구한다

- 고 이주림 조합원의 명복을 빌며-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해'

지난달 31일 드라마 '바람꽃' 촬영 도중 고 이주림 조합원은 후배 카메라맨에게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후배가 사다준 두통 약을 먹고 버텼지만 통증은 심해만 갔다. '너무 피곤하고 머리가 아파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어' 숨지기 이틀전인 지난 2일 새벽까지 이어진 '퀴즈 대한민국' 녹화 도중 또 다시 동료들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그제서야 눈이 충혈되고 얼굴이 창백해진 것을 동료 조합원은 발견했다. 다음날 이 조합원은 대휴를 신청하고 전남 광주 자택으로 내려갔다. 집에서도 새벽까지 잠을 청하지 못하고 가슴이 답답하다며 방문을 열고 나가던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4일 새벽 2시 30분. 그게 마지막이었다. 병원 응급실로 후송해 한 시간 여 동안 심폐 소생술을 했지만 끝내 눈을 뜨지 못했다. 입사한지 22년, 48살의 나이에 부인과 자녀들을 남겨 두고 불귀의 객이 되어 저 세상으로 떠났다. 백년가약을 맺은지 20년이 된 부인 박희옥 씨, 올해 대학에 진학하는 아들 봉현 군,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 지혜양은 늘 믿고 따르던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넋을 잃고 오열했다.

누가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노조는 사고 당일 고 이주림 조합원의 죽음과 관련해 긴급진상조사단을 꾸렸다. 조사 결과 고인은 숨지기 직전 한달 동안 144시간 33분의 초과근로를 했다. 하루 평균 15시간의 살인적인 노동을 한 것이다. 근로기준법 상 시간외근무는 주당 12시간, 한달 동안 50시간을 초과할 수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2004년 단협의 초과근로시간 기준의 3배에 달하는 연장근로와 밤샘노동. 고인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살인적 노동의 고통을 두통 약으로 버티다 영원히 카메라를 놓아야 했다.

근로자의 근로시간 감축과 실질적 삶의 질 향상이라는 대 명제 아래 주5일제가 실시된 지 8개월 째. 그러나 주5일제 실시 전과 비교해 제작 시설과 편성, 인력은 변하지 않았다. 과중한 노동강도는 여전했고 주5일제의 효과는 기대한 대로 나타나지 않았다. 고인이 소속돼 있던 드라마영상팀원들은 일상적으로 한달 평균 60시간에서 80시간의 초과근무를 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어디 드라마 영상 팀의 이주림 조합원 뿐인가? 지난 2000년엔 TV기술국 김동섭 차장이 높은 업무강도에 고통을 호소하다 뇌졸중으로 숨졌다. 그런가 하면 지난해 대구총국 구영모 총무부장과 라디오3국 송문종 조합원이 과로로 인한 뇌졸중과 심근경색으로 우리 곁을 떠났다.

정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KBS가 방만하다고 판단하며 지난 해 하반기부터 지속적으로 강제 퇴출과 희망퇴직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많은 직원들이 일상적인 고 강도 노동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 후유증으로 인해 사망하는 직원들이 줄을 잇고 있다. 우리는 정 사장과 경영진의 내부 경영 진단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확신한다. 불합리한 현실은 방치한 채 개혁이란 이름으로 강제 퇴출을 지속적으로 강변하는 경영진의 주장에 무능함과 뻔뻔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진상조사차 광주로 내려간 조합전임자에게 유가족들은 말했다. '직원이 죽었는데 어떻게, 어떻게 사장이 얼굴도 내비치지 않을 수 있는가?' 유족들은 또 한번 오열했다. 아버지가, 남편이 이처럼 살인적인 노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하염없이 울었고, 그런 노동현장을 만든 최고 책임자가 영정 앞에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은 데 분노의 눈물을 흘려야 했다. 사람을 죽음으로 내모는 이런 노동 현실에서도 강제퇴출을 논하고, 희망퇴직을 말하는 최고 경영진에겐 밤샘 노동을 하다 숨진 직원에게 조문이라도 하라는 것이 너무 지나친 요구였는가?

정 사장과 경영진은 강제 퇴출을 말하기에 앞서 직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현실을 직시하고 하루빨리 개선책을 마련하는데 한 점 소홀함이 없어야 한다. 또한 고 이주림 사우가 사망에 이르기까지 살인적인 노동 현장을 방치해온 제작본부장에게 명백히 그 책임을 물어야 한다. 드라마영상팀의 살인적인 노동은 일상적이라 하지 않았던가? 제작 본부장은 그 같은 현실을 사전에 파악하고 고 이 주림 사우와 같은 불행한 사태가 발행하지 않도록 만전의 주의를 기울였어야 했다.

정 사장과 경영진은 직원들의 KBS에 대한 사랑과 신뢰가 진정 가슴에서 우러나올 때 방송의 품질은 물론 시청자에 대한 서비스 개선이 이루어지고, KBS가 국민과 함께 하는 공영방송사로 자리 매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야 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유가족들께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아울러 고 이주림 사우의 순직 처리에 최선을 다해야 함은 물론, 철저한 진상을 조사와 함께, 제 2, 제 3의 이주림 사우가 발생하지 않도록 근본적인 대책을 서둘러 마련할 것을 정 사장과 경영진에게 촉구한다.

2005년 2월 14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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