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친구가 여행을 떠나며 부탁한 반려식물을 반쯤 죽여놨다. 집으로 들고 올 때까지만 해도 파릇파릇 풍성했던 이파리가 고작 일주일 사이 절반 가까이 말라버린 것이다. 일부러 그런 건 절대 아니다. 내 딴에는 식물을 위한다고 했던 일들이 오히려 더 악영향을 끼친 듯 했다.

실은, 한 번도 식물과 같이 살아 본 적이 없다. 몇 번 선물로 화분을 받은 적은 있으나 그중 살아남은 화분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틀에 한 번 물을 주면 된다는데, 대체 어떻게 얼마나 물을 줘야하는지, 환기를 시키라면 어느 정도 창문을 열어놔야 하는 건지 좀처럼 어려웠다. 이런 고충을 토로하자, 화분을 맡겼던 친구는 안타까워하며 이런 말을 했다. “그냥 사람 사는 것처럼 하면 되는데.” 어쩐지 뒷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가 사람 사는 법은 알고 있는게 맞나 싶어서.

이런 이유로 만화 <사이사이 풀풀>을 다시 집어 들었다. 지난 해 이 작품을 처음 펼쳤을 땐, 할일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정신이 없던 시기를 지나던 탓에 제목에서부터 여유가 한껏 느껴지는 이 만화에 충분히 빠져들기 어려웠다. 식물을 죽이고나서야 이런 책이 있었지, 하고 책 더미에서 <사이사이 풀풀>을 꺼내들었다. 몇 개월만에 다시 펼쳐 든 만화 <사이사이 풀풀>에선 상긋한 풀 향기가 났다.

▲ 책 ‘사이사이 풀풀’
▲ 책 ‘사이사이 풀풀’

이 만화는 삼십 대의 여자 친구들이 일상의 틈에서 식물을 발견하고, 식물에 점차 스며 드는 이야기다. 첫 페이지는 화분이 잔뜩 늘어선 미용실의 풍경으로부터 시작된다. 산에 오르던 길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곳이다. 그때부터 주인공 ‘온우’의 식물 사랑이 조금씩 깊어진다. 온우는 친구의 집에 놓인 화분을 살피고, 주변에 놓인 다육식물의 이름을 찾아 이름표를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식물원으로 소풍을 떠나기도 한다.

만화에서 온우와 그 친구들이 지내는 일상은 회색으로, 식물들은 초록색으로 칠해져있다. 이러한 색 대비 때문에 만화 전반에서 식물의 존재감이 은은하게 드러난다. 만화 속 온우의 일상 속에서 식물은 생각보다 훨씬 많이, 곳곳에 놓여 있다. 차를 타고 지나가는 창밖의 풍경과 매일같이 드나드는 아파트 입구, 무심하게 지나가는 인도 가장자리에도. 만화는 온우와 그의 친구들의 시공간을 잔잔하게 그리며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식물들을 조명한다. 등장인물들도 바쁘게 돌아가는 시간 속에서 식물을 계기로 잠깐씩 멈추어 선다. 오랜만에 흙을 만지며 직접 구근을 심기도 하고, 서로에게 식물을 선물하기도 하고, 누군가 공들여 키운 화분을 바라보며 잠깐이나마 상긋한 기운을 온몸 가득 느낀다.

▲ 책 ‘사이사이 풀풀’ 갈무리
▲ 책 ‘사이사이 풀풀’ 갈무리

회색의 장면 속에 파고드는 이 파릇파릇한 생명체는 단지 식물이기만 한 게 아니다. 초록빛의 식물들은 잠시 멈춰 서서 한숨 돌릴 수 있는 ‘틈새’, 숨 쉴 구멍을 의미한다. 이런 순간들은 우리 주변에 늘 있지만, 바쁘게 지나쳐가느라 주의를 기울이지 못해 늘 놓치곤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사이사이 풀풀>은 식물을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살뜰한 만화임과 동시에 '풀'과 같은 여유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책을 덮으며 나는 지금까지 빼곡하게 써 넣었던 신년 계획을 모두 지우기로 마음 먹었다. 본래 반려식물을 들이는 것도 계획 중에 하나였지만, 그것도 일단은 미뤄뒀다. 식물을 기르기 전에, 식물과 같은 시간을 먼저 가져보자 싶어서. 흙을 만지며 흙 냄새도 맡아보고, 바람이 솔솔 부는 날 바람도 느껴보고. 햇빛 좋은 날엔 밖에 나가 가만히 햇빛 아래 앉아있는 것. 그게 내가 잊고 지내던, 그리고 많은 사람이 놓쳐버린 ‘사람 사는 법’ 아닐까. 새해에는 모두에게 숨 쉴 사이가 있었으면 좋겠다. 분주하고 힘든 시간일 수록, 잠시 멈춰 서서 상긋한 냄새를 맡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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