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보단 저자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겠다. 그를 처음 만난 건 19대 국회, 박근혜 정부 시절. 그는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비서였다. 지난 2014년 진 의원이 대표 발의한 형제복지원 특별법 제정을 강하게 요구하던 시기다. 돌이켜보면 19대 국회 당시 민주당은 과반을 훌쩍 넘긴 현재 21대 국회 민주당보다는 야당다웠던 것 같다. 당시 진 의원은 야당다운 민주당을 만드는 일원이었다. 

두 번째 인연은 지난 20대 국회 말인 2020년 그가 ‘외롭지 않을 권리’란 책을 냈을 때다. 끝내 발의하지 못한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당시 미디어오늘에 “19대 국회 땐 법안 관련 토론회를 했는데 여론 형성은 안 된 채 비판이 너무 거셌다”며 “20대 국회에서 발의 타이밍을 봤는데 민주당이 여당이 되고 진 의원이 여성가족부 장관이 되면서 정부의 공식 입장처럼 비쳐 폐쇄적인 정치 논리상 어려워졌다”고 했다. 

21대 국회에서 생활동반자법은 기본소득당 등 소수정당 의제가 됐다. 민주당이 국회 의석 과반을 차지한 것도 주목되지만 민주당은 특히 수도권에서 기득권 정당이 됐다. 생활동반자법은 다양한 가족 개념을 인정하자는 사회적 흐름이지만 민주당은 이 법을 논의하거나 통과할 의지가 없는 권력 집단이었다. 국회 보좌관이던 그는 입법 활동 대신 생활동반자법을 준비했던 ‘작가’로서 대중 앞에 서야 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넘어가던 시기 그는 국회에 들어와 진선미 의원실과 장철민 의원실 보좌관을 거치고 문재인 정부 말기 청와대 정무수석실 행정관을 지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인 윤석열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본 저자는 박지현 전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정무조정실장을 짧게 지냈다. 86세대를 강하게 비판하던 박 전 위원장은 금방 잊혔고 그도 여의도를 떠났다. 

정치가 한 명의 국회의원이나 보좌진 뜻으로만 되는 건 아니라지만 그가 느꼈을 갑갑함을 짐작할 수 있다. 민주당 정부 출신의 국민의힘 대통령, 청년 정치의 무력함, 시대변화를 담아내지 못하면서도 덩치만 계속 커지는 민주당의 무능 등을 실무자로서 겪어 왔다. 무엇보다 민주당 의원실 보좌진이나 당직자의 괴로움은 직장 상사들이 죄다 운동권 꼰대라고 비판받는 ‘86’이란 점이다. 

올해 초 그를 다시 만났다. 책은 잘 나가는지, 프리랜서 삶은 어떤지 물었다. 생활동반자법이 꾸준히 주목받고 있지만 책을 팔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저자는 역시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라디오 고정 출연으로 매일 제출할 아이템과 원고에 시달리는 ‘마감노동자’였다. 22대 총선이 1년 정도 남았는데 국회에 복귀해 선거운동을 할 거냐는 질문에 그는 긍정적인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86세대(군부독재에 저항했던 19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학생운동 세력)를 주제로 책을 쓰고 있다고 했다. 

글쓰기는 거리를 두는 일이다. 1984년생, 86의 후배세대인 86의 동업자가 이제 그들을 떠나보내는 일이다. 이는 86과 한 배를 타보지 않은 당내 비주류나 보수진영이 제기하는 ‘용퇴론’과는 좀 다르다. 86과 민주당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하지만 이제 유통기한이 훌쩍 지나 상하고 있는 치즈처럼 버려야 할 시간이 됐다는 진단에 가깝다. 

▲ 성공한 민주화, 실패한 민주주의/ 황두영 지음/ 클 펴냄
▲ 성공한 민주화, 실패한 민주주의/ 황두영 지음/ 클 펴냄

황두영의 책 <성공한 민주화, 실패한 민주주의> 관련 기사 중 지난 15일자 중앙일보 정치에디터 칼럼이 눈에 띈다. “(책에선) 이런 정치(민주당의 정치)를 때론 헌법 침해도 정당화하는 ‘반적폐 포퓰리즘’이라고 진단한다. ‘86들은 후배들이 시대정신을 제시 못해 아직 물러날 수 없다고 한다. 당장 일자리 양극화나 전세 사기도 해결할 방안이 없으면서 정치를 위해 뭔 시대정신씩이나 필요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민주당은 투쟁에 갇혀 ‘유능한 민생정당’이란 강령 맨 앞에 적힌 의무조차 포기할 것인가. 아직 총선까진 넉 달 넘게 남았다.” 책에 나온 수많은 문장 중 보수언론이 소환한 부분은 역시 ‘무능하고 시대착오적이지만 욕심부리며 퇴장하지 않는 86’에 대한 비판이다. 

실제 책은 86들이 어떠한 대학시절을 보내면서 그들의 세계관을 만들었고 87년 6월항쟁을 거치고 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 훑어보며 그들을 분석한다. 즉 86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방점이 찍혀 있다. 저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현실 정치인으로 변신한 86세대를 우상호·이인영 등 주요 86정치인의 말과 글로 이해하면서도, 86을 단순히 일부 정치인의 인적 네트워크가 아닌 이들이 만든 ‘정치적 세계관’으로 정의한다. 

저자는 86정치 핵심을 ‘포퓰리즘’(책 17쪽)으로 정의한다. ‘순수한 민중’과 ‘부패한 권력자(엘리트)’라는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누고, 각 진영 내에서는 하나의 이해관계를 갖는다(가져야 한다)고 보는 사고방식이다. 86식 포퓰리즘이 민주당의 주류 정서가 됐기에 운동권 출신 86의원이 퇴장한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란 의미다. 

민주당 지지층 중 상당수는 이러한 86식 세계관을 왜 문제 삼는지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한국에서 ‘정치 고관여층’이 되는 과정이 사실 86식 세계관 형성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되는 배경은 정당정치가 발달한 유럽과 같은 선진국과 사뭇 다르다. 

한국에 소개된 유럽의 정치는 정당들이 청소년들의 ‘민주주의 학교’를 자처한다. 청소년들이 문턱 낮은 정당에서 활동하고 특정 정당 지지를 정체성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게다가 학교에서 자본주의 계급 문제를 배우고 노사교섭 등의 현실 정치를 경험해보는 곳에서 ‘정치’는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다. 교과서에서 정의한 ‘희소한 가치의 권위적 배분’ 과정이다. 

한국에서 정치란 요즘 유행어로 ‘여의도 사투리’를 쓰는 자들의 것이다. 미성년자들에겐 정치를 금기로 만들고, 성인이 돼선 정치 말고도 신경 쓸 게 많은 사회에서 정치 뉴스를 찾아보게 되는 계기는 개인의 삶이나 생각에 충격이 가해졌을 때다. 민주당 지지층의 경우 보통 노무현의 죽음,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절 벌어진 국가권력 남용 등이다. 뒤이어 군부독재 시절 잔혹한 현대사를 접하며 선악의 경계를 공고히 한다. 깨어있는 시민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그들 덕분에 민주주의의 역사가 발전한다고 믿는다.

자연스레 정치를 ‘나쁜 권력자를 깨어있는 시민이 견제하는 권력 투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적과 동지’ 이분법은 민주당을 포함해 민주진보진영 유권자들의 구심력이자 86들이 40여년에 걸쳐 여러 난관에도 사회 주류로 진입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시민들의 생계나 안전이 달린 문제조차 상대 진영을 대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힘이고, 달라진 세상에 86들이 적응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 요소다. 민주당을 비판하는 언론사를 배신자로 치부하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지난 10월 나온 이 책을 천천히 곱씹었다. 내용이 난해하거나 가독성이 떨어져서는 아니다. 40여년 현대사의 무게감과 총선을 반년 앞두고 다시 나올 86용퇴론이 그리 간단하지 않아서다. 86정치인 퇴출을 말하긴 쉽지만 86식 세계관과 결별은 쉽지 않다. 86정치인 빈자리를 상대적으로 젊은 신인이 차지한다고 해서 민주당이 달라질 거란 생각은 착각이다. 21대 국회의 수많은 젊은 초선 의원들을 보면 알 수 있다. 86에 동화되거나 대상화하는 식의 민주당 청년 정치는 현재로선 실패다. 이 책이 그나마 냉철하지만 애정 어린 시선으로 86을 분해해 떠나보내는 작업인데, 이마저도 꽤 늦었다.

그러던 중 지난 21일 민주당 젊은 정치인 몇몇이 병립형 선거제 반대 기자회견을 열었다. 저자는 그곳에 이름을 올렸다. 책 내용보다 정치인으로 변신한 저자에 초점을 둔 이유다. 잠시 그의 첫 행보인 선거제 이슈를 좀 들여다보면, 현재 이탄희 민주당 의원이 주장하는 ‘위성정당 방지법’ 당론 채택에 이름을 올린 의원은 친명계와 비명계를 가리지 않는다. 옛 운동권으로 보기 힘든 이재명이 당 대표가 됐지만 여전히 민주당 내 주요 갈등 축인 친명과 비명의 갈등은 ‘1인자와 거리’일 뿐 정책적 차이가 아니란 단적인 예다. 86은 국민의힘의 정치 방식이나 정책과 근본적 차별점이 없고, 여러 차례 당내 성비위와 조국 사태 등을 겪으며 자신들의 무기였던 도덕적 정당성도 잃었다.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패배한 국민의힘과 대통령실에 대한 비판이 연일 나오고 있다. 여권 내부 사정이 속속들이 알려지고 ‘김포 서울 편집’, ‘인요한 혁신위’ 등 여권이 이슈를 주도한다. 그래서 민주당이 위기다. 기존 체제는 한계에 달했지만 새로운 체제는 보이지 않고, 위기가 왔지만 위기를 말하지 않는다. 절반 이상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지만 국민 절반 이상에게 외면받고 있는 지금의 민주당은 그 자체로 ‘정당 민주주의의 위기’다. 

“글 쓸 힘이 나지 않으면 스마트폰으로 하염없이 숏폼 영상들을 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영상들을 보고 있자면 참 요새 애들은 진짜 아무 데서나 춤을 추며 영상을 찍는구나 싶다. 학교, 공원, 마트, 전철역 어디서든 친구들과 유행하는 율동을 찍어 올린다. 더 신기한 건 딱히 엄청 어렵거나 잘 추는 춤도 아니란 것이다. (중략) 숏폼 속 대한민국에는 근대화되지 못한 조국에 대한 열등감도, 정상국가 콤플렉스도 없다. 그렇게 숏폼 영상을 보다 간담이 서늘해진다. 우리의 정치가 영상 속 저들에게서 점점 멀어진다. 이미 너무 멀어진 것 같다. 너무 멀어서 가닿을 수 없을 것 같다.”(책 275쪽)

▲ 내년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힌 황두영 작가
▲ 내년 총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힌 황두영 작가

지난 23일 저자는 서울 서대문갑 지역구로 내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했다. 그가 오랫동안 살아온 이곳이 86 핵심 정치인인 우상호 민주당 의원(87년 6월 당시 연대 총학생회장)의 지역구인 점은 상징적이다. 출마선언문에서 “정치가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방치되고 있다”고 했다. 수많은 정치인이 해왔고 할 말이다. 민주당은 형제복지원 인권 침해 사건이나 생활동반자법 제정을 말했던 젊은 정치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을까. 유능한 보좌진이었고, 날카로운 작가였던 그는 86식 포퓰리즘과 결별한 정치인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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