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그런데 ‘좌파’가 뭔가요?

한동안 잊고 있었던 일화가 생각나는 요즈음이다. 내가 대학 선생으로 첫 강의를 시작한 이천년대 초반의 기억이다. 20세기 문화이론의 학습에서 ‘마르크스 주의’나 ‘좌파’라는 어휘는 유의미한 지성의 사유로 반드시 다뤄진다. 이는 내가 아는 한 거의 모든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러하다. 이런 수업을 하고 강의실을 나서려 할 때 한 학부생이 수줍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온화하며 겸손한 질문은, “선생님, 그런데 좌파가 뭔가요?”

그즈음 대학생들은 대부분 1980년대생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중견인 40대에 해당한다. 나는 이 학생의 질문으로 비로소 깨달았다. 이들은 1980~90년대에 걸쳐 긴박하게 진행된 소련의 해체와 개방, 베를린 장벽 붕괴,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 이후 성장한 이들이라는 걸. 한국인이 중국과 러시아로, 더 낭만적으로는 체코와 폴란드에 여행을 다니고 ‘메이드 인 차이나’가 찍힌 상품들로 일상을 생활하는 게 자연스런 세대라는 걸. 공산주의에 대한 열정과 공포,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한반도의 첫 세대라는 걸. 공산주의, 좌파, 종북좌파, 심지어 반공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먼 과거의 일로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는 축복받은 인류라는 걸.

▲ 1989년 11월 서베를린인이 베를린 장벽을 파괴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 1989년 11월 서베를린인이 베를린 장벽을 파괴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21세기 ‘섹시’한 공산주의자

‘섹시’한 공산주의자의 출현은 21세기 한반도의, 아니 지구적 미디어 풍경의 흔한 일상이다. 2010년 블록버스터 영화인 <의형제>에서 강동원이 연기한 송지원은 남파된 북한 엘리트 첩보원이다. 우리는 달콤하게 중얼거렸다. 아니, 북한 엘리트 첩보원이 저렇게 매혹적인가? 아울러 2020년 즈음 시청률 24%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서 리정혁은 북한의 특급 장교다. 심지어 대중적 인기가 드높던 현빈이 연기한 덕에, 이 북한의 멋진 특급 장교와 한국 재벌가 딸과의 로맨스를 대중은 기꺼이 환영했다.

한편 올여름 전 세계적인 인기와 평단의 극찬을 거머쥔 영화 <오펜하이머>는 어떠한가? 핵폭탄을 인류에게 가져다준 과학자 J.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탁월한 손길을 거쳐 현대의 프로메테우스로 부활했다. 실제 오펜하이머는 카리스마와 매력이 남달랐던 인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게다가 지적이고 우수에 젖은 듯한 배우 킬리언 머피가 그 역을 멋지게 구현함으로써, 오펜하이머가 체현했던 공산주의자 삶의 깊이를 관객들은 더욱 투명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사유, 신념, 희망, 야심,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과 불행의 의미를 성찰할 수 있었다.

▲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 영화 '오펜하이머' 포스터.

이 같은 미디어 문화 안에서 우리는, 이념으로 억압하고 이념으로 이기려는 정치란 얼마나 부당하고 비겁한지, 나아가 그 암울한 조건에서조차 한 인간의 색채가 얼마나 무한하게 빛날 수 있는지에 대한 감각을 자연스럽게 키워올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지난 수십 년간 대부분의 호모 사피엔스들은 ‘공산당 나쁜 놈, 반공 착한 놈’ 같은 단순한 논리를 뛰어넘을 줄 아는 성숙한 시야를 갖추게 되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외침에도 더 이상 열광하지 않는다.

이 변화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선택일 수도 있지만 격동하는 세계사의 흐름 안에서 ‘정치적임’에 대한 사회적 사유가 성숙했기에 도달할 수 있었던 복된 결실이기도 하다. 1+1=100이라고 믿을 만큼 무지해서가 아니다. 정치와 사회라는 게, 또 이념이란 것도 물론, 찬반의 양극단으로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복잡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숙고하는 현명함 때문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무조건‘반국가세력’이라고 공격하는 일 따위는 수치스러운 행위라는 점 역시 유념하기 때문이다. 더욱 중요하게는, 무릇 국가란 서로의 차이를 존중하는 가운데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지향해야 하리라는 가치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21세기 ‘공산 전체주의’에 관한 ‘공포몰이’

국립 국어표준대사전의 온라인 사이트에서 요즘 대통령이 공격 대상으로 애용하는 ‘공산전체주의’의 뜻을 찾아보았다. 이십 년 전 내게 질문했던 학생에 이어, 지금 와서 내가 이런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최근 한 이용자가 올린, ‘공산 전체주의’의 뜻을 묻는 질문(나만 모르는 건 아닌가 보다)에 대한 국립 국어표준대사전의 답변은 다음과 같다:“ (중략) ‘공산주의’는 정치 전문어로서는 ‘마르크스와 레닌에 의하여 체계화된 프롤레타리아 혁명 이론에 입각한 사상’을 뜻하고 (중략) ‘전체주의’는 사회 일반 전문어로서 ‘개인의 모든 활동은 민족·국가와 같은 전체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서만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을 뜻하며, 이탈리아의 파시즘과 독일의 나치즘이 대표적입니다.”

▲ 국립국어원 "공산전체주의의 뜻에 대해 알려주세요" 질문과 답변 갈무리
▲ 국립국어원 "공산전체주의의 뜻에 대해 알려주세요" 질문과 답변 갈무리

그리하여 이 권위 있는 대사전의 결론은? “문의하신 ‘공산 전체주의’는 국어사전에 올라 있지 않아 의미를 안내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체 왜 21세기 한국의 대통령이 파시즘과 나치즘에 대한 분노에 시달리며, 사전에 있지도 않은 단어로 ‘공포몰이’를 주도하는 걸까? 이 물음과 관련하여, 최근 지지율(‘대통령으로서 직무수행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로 표명되는 대통령에 대한 시민들의 평가는 지금 한국 사회에 현존하는 간극의 본질을 정확히 드러낸다. 한편으론 한국 사회 이념 지형의 역사적 변화, 다른 한편으론 이런 변화에 무지하거나 이를 부정하는 대통령의 오류, 이 둘 사이의 간극이다.

일례로 한국갤럽이 진행한 9월 1주 차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자의 비율이 40대 이하는 10%대이며 50대가 되어서야 30%를 간신히 넘는다. 결코 ‘요즘애’들의 철모르는 ‘투정’이 아니다. ‘반공’이란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고, ‘섹시’한 공산주의자를 이해할 줄 알며, 사회적 다름을 존중하는 정치적 감수성을 체득해 온, 한국 사회의 젊은 주축 세대들의 중론이다.

▲ 2023년 9월 1주 갤럽리포트 갈무리. 사진=갤럽 홈페이지
▲ 2023년 9월 1주 갤럽리포트 갈무리. 사진=갤럽 홈페이지

최근 대통령의 공산 전체주의자 이념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존재하지 않는 단어’로 공격하며 자기도취에 마비되는 불쾌한 권력이다. 일상적인 대화라면 개인의 맹신적인 열광의 하나로 양해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통령이란 한 국가 내 ‘유일’한, 그리고‘최고’인 권력과 결합하면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이념 전쟁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명백하게 유권자인 시민 대부분이 지지하지 않는다.

오로지 반공에 의존하는 통치의 역사란 얼마나 질기고 천박한가. 과연 한반도에 ‘공산, 반공, 반-반공…’으로 이어지는 남루한 이분법 넘어 새로운, 창발적인 보다 나은 미래란 언제나 도래할 수 있는가.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광복절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8월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광복절 노래를 제창하고 있다. 사진=대통령실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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