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 여성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된 정유정씨의 범죄 행태를 분석하며 자폐 성향이 있다는 전문가 발언을 방송한 SBS <그것이 알고싶다>가 정신장애에 대한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에 대해 사과했다. 제작진은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이슈를 전할 때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는 지난달 17일 정유정씨의 범행을 다루는 과정에서 정씨의 자폐 성향에 대해 묘사했다. 이광민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고등학교 친구들의 증언을 보면 정유정이 가지고 있는 성격의 맨 바탕에는 자폐적인 성향이 엿보인다”며 슬리퍼를 신고 있었던 정유정의 차림새와 걸음걸이를 두고도 “자폐적 특성을 고려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도 ‘고기능성 자폐’의 특성에 대해 말했는데, 방송은 고기능성 자폐를 자막과 내레이션으로 자세히 설명했다.

▲ SBS 그것이알고싶다 1356회 ‘밀실 안의 살인자, 정유정은 누구인가’ 방송화면 갈무리.
▲ SBS 그것이알고싶다 1356회 ‘밀실 안의 살인자, 정유정은 누구인가’ 방송화면 갈무리.

방송 내용 중에는 자폐 성향이 범죄와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설명도 있었지만, 방송은 반복적으로 자폐 성향에 대한 인터뷰를 내보내고 자폐에 대해 설명하며 ‘정유정’과 ‘자폐’라는 키워드를 연결시켰다. 전문가 발언 중에도 자폐가 범죄의 원인이 아니라는 내용이 있지만, 자폐에 대해 상당한 분량을 할애했기 때문에 방송을 본 시청자들은 자폐가 정유정의 범행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더라도 연관이 있는 것처럼 오인할 수 있다. 방송 직후 타 언론에서는 자폐와 정유정의 범행을 연결짓는 보도가 쏟아졌다.

▲ SBS 그것이알고싶다 1356회 ‘밀실 안의 살인자, 정유정은 누구인가’ 방송을 인용한 언론보도 제목들.
▲ SBS 그것이알고싶다 1356회 ‘밀실 안의 살인자, 정유정은 누구인가’ 방송을 인용한 언론보도 제목들.

자폐를 범죄의 원인인 것처럼 연결짓는 방송에 전국장애인부모연대, 한국자폐인사랑협회 등 단체들은 “범죄자의 동기를 자폐와 연관 짓는 언론보도의 양태는 장애를 낙인화하는 전형적인 구태”라고 비판했다. 범죄자와 직접 만나 진단하는 과정을 거치치 않은 상태로 몇몇 주변 사람들의 증언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진단명을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논하는 일은 부정확하고 경솔할 수 있고, 한 인간이 어떤 정신적 상태를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고 그것을 공개적으로 언론을 통해 말하는 과정은 충분한 검토를 거치고 신중해야 한다는 지적도 이어졌다.

비판이 이어졌지만 <그것이 알고싶다>는 지난달 23일 유튜브 채널의 ‘그알 비하인드’ 영상에서 또다시 정씨의 자폐 성향에 대한 전문의의 인터뷰와 ‘고기능성 자폐’를 설명하는 화면을 내보냈다. 다만, 해당 회차를 담당한 정재원 PD는 유튜브에서 “방송 후 사무실로 자폐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로부터 항의 전화가 왔었다. 우리는 방송에 ‘자폐 특성이 범죄와 연관되지 않는다’는 걸 여러차례 넣었다”며 “정유정을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이해의 틀로써는 의미가 있지만 다른 선량하게 살아가는 자폐가 있는 분들에 대한 피해로 이어지면 안된다. 자폐라는 이유로 이런 범행을 꿈꾸고 계획하는 건 전혀 이해관계에 맞지 않은 얘기라는 걸 다시 한번 말씀드리고 싶다”고 언급했다. 

▲ 지난달 23일 게재된 유튜브 '그알 비하인드' 영상 갈무리.
▲ 지난달 23일 게재된 유튜브 '그알 비하인드' 영상 갈무리.

이후 제작진은 지난 3일 <그것이 알고싶다> 시청자 게시판에 사과문을 올렸다. 제작진은 “전문가들과 함께 정유정의 과거 행적과 범행의 특징을 분석해 동기를 분석하는 한편, 재발 방지를 위한 사회적 예방책을 함께 강구해보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정신의학과 전문의나 심리학자들로부터 정유정에게 ‘자폐 성향’이 엿보인다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고, 고등학교 졸업 후 범행에 이르기까지 5년이라는 시간 동안 트리거가 될 만한 사건이 있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얻을 수 있었다”며 “정유정의 이상행동을 살펴보는 관점 가운데 하나로 ‘자폐 성향 가능성’이 제시됐지만, ‘자폐 성향이 범죄로 이어진다’거나 ‘정유정에게 면죄부가 될 수 있다’는 오해를 줄 수도 있어 방송에서는 3회에 걸쳐 ‘자폐 성향 자체와 범죄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강조했다”고 했다. 

제작진은 “안타깝게도 제작진의 의도와 달리, 방송 후 여러 매체에서 ‘정유정의 범죄가 자폐 성향 때문’이라는 것처럼 요약 기사를 내기도 했고, 자폐 스펙트럼을 가진 장애인들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글들이 유포되는 상황도 발생했다”며 “제작진은 부당한 편견에 맞서 사회적 약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오신 분들과 해당 장애 당사자분들께 심려를 끼쳐드린 점에 대해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 지난달 23일 게재된 유튜브 '그알 비하인드' 영상 갈무리.
▲ 지난달 23일 게재된 유튜브 '그알 비하인드' 영상 갈무리.

아울러 “오랜 시간 우리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대해 질문을 던져 온 <그것이 알고 싶다>인 만큼, 방송에서 ‘자폐’라는 용어를 쓰는 것 자체부터, 어떻게 이를 오해 없이 전달할지 고민이 깊었지만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며 “차별과 편견으로 고통받아온 분들께 상처를 드리게 돼 다시 한 번 죄송한 마음을 전한다. <그것이 알고 싶다> 제작진은 사회적 약자와 관련한 이슈를 전함에 있어, 앞으로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약속드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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