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례에 문제 제기한 사람. 많은 사람이 ‘나도 힘든데 하지 말까?’라고 할 때 그러지 않은 사람. 클럽에 자주 가고, 잘 놀던 사람. 거대한 벽 앞에서 낼 수 있는 마지막 목소리를 낸 사람. 특이한 사람. 평범한 사람.”

고 이한빛 PD 유족과 그를 추모하는 이들은 이한빛 PD를 이같이 묘사했다. 고 이한빛 PD의 5주기 추모제가 26일 저녁 서울 동교동 청년공간JU동교동에서 열렸다. 산재사망 유가족과 방송 비정규직 노동단체 활동가들은 “혼자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이 없도록 함께 목소리 내 싸우는 게 남은 이들의 책무”라고 했다.

이한빛 PD는 열악한 방송노동 환경을 고발하는 유서를 남기고 2016년 10월26일 세상을 떴다. 그는 그해 CJENM에 입사해 드라마 ‘혼술남녀’ 조연출로 일하며 비정규직·프리랜서 방송노동자에 대한 해고 등 부당한 업무를 떠안고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 그의 사망 이후 대책위원회가 꾸려져 노동현장 부당행위를 밝힌 뒤 사측은 사과와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이한빛 PD의 가족은 2018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를 설립해 이한빛 PD 뜻을 실현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이한빛 5주기 추모제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왼쪽부터)정혜윤 CBS PD와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 어머니 김혜영씨, 친구 박현익씨. 사진=김예리 기자
▲이한빛 5주기 추모제 북콘서트에서 사회를 맡은 (왼쪽부터)정혜윤 CBS PD와 이한빛 PD의 동생 이한솔씨, 어머니 김혜영씨, 친구 박현익씨. 사진=김예리 기자
▲고 이한빛 PD.
▲고 이한빛 PD.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 한빛센터 이사장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이 땅의 청년노동자, 방송노동자가 죽지 않는 세상을 위해 쉼없이 달려왔다”며 “그럼에도 안전한 일터는 요원하다. 지난해 겨울 저와 강은미 의원 등의 단식 투쟁으로 통과된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도 되기 전에 폐지를 공약하는 무지막지한 사회”라고 했다. 그는 “한빛아, 5주기 맞으니 더욱 보고 싶고 미치도록 그립다”고 말했다.

이날은 에세이 ‘허락되지 않은 내일’을 쓴 이한빛 PD 동생 이한솔씨와 ‘네가 여기에 빛을 몰고 왔다’의 저자인 어머니 김혜영씨가 합동 북콘서트를 열었다.

김혜영씨는 책에 쓰인 ‘한빛이 남긴 것을 이어간다’는 표현을 두고 “한빛이를 기억한다는 게, 한빛이만 그리워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게 아니더라.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키는가의 문제였다”며 “엄마로서 측은하고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 피해자 운동의 주체로, 내 아들의 죽음을 넘어 다시는 죽음이 없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천은 쉽지 않다”고 했다.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와 동생 이한솔씨. 사진=김예리 기자
▲이한빛 PD 어머니 김혜영씨와 동생 이한솔씨. 사진=김예리 기자

이한솔씨는 “이 곳에 온 분들 중 실제로 형을 아는 분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방식이 특정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데, 다른 기억을 남겨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고 책을 쓴 계기를 설명했다. 그는 “청년 이슈를 관통하던 주제가 인천공항 정규직화 반대 시위와 ‘영끌’, 청년 야당 대표의 선출 등이었다. 고민이 납작하게 얘기된다는 생각에 형의 이야기와 (형을)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연결하고자 했다”고 했다.

정의당 대선 후보인 심상정 의원은 추모제를 찾아 “김혜영 선생님이 잠든 아이를 보며 ‘누굴 닮아 잘생겼나’라고 생각했다고 쓴 평범한 구절에 가슴이 먹먹했다”며 “고 이한빛, 김용균, 구의역 김군, 홍정운, 그리고 언급 못한 모든 안타까운 이름들은 평범한 우리 자식들이다. 카메라 뒤에도, 밑에도, 옆에도, 불 꺼진 발전소, 지하철 곳곳에도 사람이 있다”고 했다.

심 의원은 “이들을 발견하지 못하는 정치가 과연 자격이 있는지 별이 된 청년들이 묻고 있다”며 “지난해 정치가 해야 할 일을 유족들이 (단식으로) 대신 하는 모습에 면목이 없었다. 오늘 여러 유족들과 방송작가, 미디어 노동자들 앞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를 절망으로 내모는 사회를 바꾸기 위해 힘쓰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이한빛 5주기 추모제를 찾아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이한빛 5주기 추모제를 찾아 추모사를 하고 있다. 사진=김예리 기자

산재사망 유가족도 추모제를 찾았다. 수원 은하종합건설 노동자 고 김태규씨 누나 도현씨는 “이한빛 PD의 아버지 이용관님은 지난해 뼈를 깎는 추위에 곡기를 끊어가며 제2의 이한빛, 이재학을 만들 수 없다는 마음으로 싸웠다. 그 결과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됐다”며 “그러나 이한빛 PD님, 죄송하다. 한해 500명 이상이 직장 내 괴롭힘과 과로자살로 숨지지만 이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고 했다. 김씨는 “비정규직의 절규가 멈추고 이한빛 PD가 원했던 세상으로 바뀌는 날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윤창현 전국언론노동조합 위원장은 “언론노조가 대의명분을 내세우며 ‘그래, 이게 중요하니 저 얘긴 좀 이따 하자’는 식으로 계속 책임을 미뤄왔다. 한빛 PD가 거대한 벽 앞에서 낼 수 있는 마지막 목소리를 낼 때 언론노조나 다른 동료가 인기척이라도 냈다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은 충분한 인기척이 되고 있나 반성한다”고 했다. 그는 “방송작가와 스태프들이 껍데기를 깨는 줄탁동시를 언론노조와 함께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날 제2회 이한빛 PD 미디어노동인권상 시상식도 열렸다. 방송작가유니온(언론노조 방송작가유니온)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가 공동 수상했다.

▲제2회 이한빛 PD 미디어노동인권상을 받은 방송작가유니온의 김한결 지부장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김기영 지부장. 유튜브 갈무리
▲제2회 이한빛 PD 미디어노동인권상을 받은 방송작가유니온의 김한결 지부장과 희망연대노조 방송스태프지부의 김기영 지부장. 유튜브 갈무리

김한별 방송작가지부장은 “이한빛 PD가 돌아가신 2016년 당시 서브작가로 매일 새벽에 퇴근하고 밤을 새며 일하다 그 소식을 들었다. 어떤 마음일지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알 것 같았다”고 했다. 그는 “방송작가유니온이 출범 준비하던 시기였고 이후 스태프지부, 다온분회 등이 생겼다. 방송작가가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로 인정받고 방송3사에 근로감독이 착수되는 등 상상 못한 일들이 현장에서 바뀌어가고 있다”며 “혼자 고통받는 사람이 없도록 함께 목소리 내 싸우는 게 남은 이들의 책무 같다”고 했다.

김기영 방송스태프지부장은 “현재 KBS의 드라마 제작사 총 6곳을 고용노동부에 고발해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며 “이 고발이 KBS만 아니라 CJENM과 종편, 넷플릭스 같은 OTT까지 이어져 방송제작 현장의 모든 노동자가 노동자성을 인정받고 근로계약서를 쓰고 일할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CJ제일제당 진천공장 현장실습생 고 김동준 어머니 강석경씨와 이채은 청년유니온 위원장 등도 추모사를 했다. 추모제에선 현장 제보를 바탕으로 방송·미디어 일터의 현실을 그린 연극 ‘게임의 룰이 잘못되었습니다’도 실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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