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부조리와 불평등을 어떻게 바라보고 풀 것인가는 중요한 문제다. 그러나 불평등의 대척점에 서서 ‘공정’을 말한다면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이다. 문재인 정부에서 실종된 개혁과 보수 양당에 국한된 협소한 정치 구도는 청년세대의 삶과 연관된 다양한 의제를 왜곡시키곤 한다. 이에 대해 청년학생들이 “세대가 아닌 시대를 말한다. 진보 청년·학생 단체 청년 시국선언”를 발표했다. 시대의 문제인 기후위기와 불평등, 차별 등 다양한 사회의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는 청년세대를 비롯해 전 세대의 목소리를 ‘청년시국선언원탁회의’에서 기획 연재한다.

<연재 순서>
① 우리는 왜 세대로 환원하는 것에 반대하는가-김건수 (청년학생 시국선언 집행위원)
② 청년비정규직 노동자가 말하는 노동시장의 불공정, 불평등-김태훈(한국지엠비정규직 청년노동자)
③ 능력주의는 장애인차별에 왜 무력한가-유진우 (노들장애인자립센터 청년장애인)
④ 학력주의에 기반 한 공정담론이 청년의 이해를 대변 못하는 이유-김정래 (투명가방끈)
⑤ 공정담론은 여성의 안전한 삶과 평등한 일자리에 대안이 되지 못 하는가-안지완 (인천대 페미니즘 학생모임 젠장)
⑥ 공정이 아니라 불평등에 대한 싸움을 벌여야 할 때-명숙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⑦ 정상성을 기준으로 한 능력주의는 차별을 막기 어렵다-한빛 (청소년트랜스젠더인권모임 튤립연대)
⑧ 시대의 위기를 바꾸기 위해 정치를 바꿔야-신지예 (한국여성정치네트워크)

세대론에 기반한 정치는 선별과 배제의 정치로 귀결된다. 세대론의 특징은 청년세대가 단일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전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청년세대 내 다양하고 복잡한 사회적 위계구조를 은폐한다.

세대론은 나이를 기준으로 인구집단을 구분한다. 하지만 나이를 기준으로 한 세대 담론은 청년세대가 놓인 구체적인 현실을 제대로 보기 힘들게 한다. 한국 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 비성소수자와 성소수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자산의 크기에 따른 위계구조로 구성돼 있다. 소득, 학벌, 계급·계층, 성별, 성 정체성, 성적 지향, 장애 유무 등에 따른 사회적 위계보다 선행하는 세대적 동질감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세대담론엔 여러 위계구조 대신 나이 차이에 따른 청년세대와 구세대의 위계구조만이 유일한 분석틀로 주어진다. 그 결과 현실의 차별과 억압을 은폐한다.

‘일부 청년’만을 선별해 전체 청년을 대표하는 듯 집중 조명하는 선별과 배제의 정치로 은폐를 극대화한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은 보궐선거 참패를 반성한다는 명목으로 두 차례 청년들을 초청해 간담회를 열었다. 초청된 청년들이 무슨 기준으로 선별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초청된 이들은 ‘올해 대학에 입학한 대학 새내기’ 같은 젊은 대학생을 중심으로 구성됐다. 정치가 미리 적절한 청년의 상을 정해두고, 이에 맞는 청년들만 일부분 선별해 전체 청년의 입장인 양 호도하고 있다. 전형적인 대상화이다.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하지 않고, ‘세대’라는 모호한 분석 틀에서 현실을 진단하니, 정치는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최근 보궐선거 이후 정치권은 ‘이남자’의 표심을 잡기 위해 여성 의무징집제나 군가산점제 부활을 공언하고 있다. 애초에 이번 보궐선거는 여당의 남성 지자체장이 여성 직원에게 성폭력을 가해 벌어졌음에도, 선거 이후 발언권이 역차별을 호소하고 있는 20대 남성에게 되돌아가고 있다.

▲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가 지난 4월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
▲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가 지난 4월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

 

보수 양당이 만든 세대 담론

흔히 착각하지만 세대 담론의 주인공은 청년세대가 아니다. 세대 담론을 일부 청년만을 선별하고, 나머지 청년들을 배제한다. 오히려 정치가 세대담론을 적극적으로 수용할수록 청년과 정치의 거리는 멀어진다.

담론에도 권력이 있다. ‘이남자’, ‘이여자’, 'MZ세대‘와 같이 청년세대에게 붙인 꼬리표는 청년 스스로가 지은 것이 아니다. 이 ‘이름 짓기’의 향연에는 기존 체제에 기생하는 이들의 의도가 있다. 청년세대를 통해서 가시화된 사회모순 해결능력이 없는 보수 양당이 청년세대를 자신의 정치에 알맞게 가공해 기존 정치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세대론’은 청년 중 일부분만을 선별해 마치 이들이 전체 청년을 대변할 수 있는 것처럼 착시효과를 준다.

오늘날 청년세대는 신자유주의 시대의 자화상이다. 치열한 경쟁에도 삶은 불안정하다. 삶의 필수적 권리가 경쟁의 보상물로 둔갑했기 때문이다. 청년세대의 불안정한 삶의 근원에는 불안정 노동체제와 토지 불로소득 시대가 있고, 가부장제와 성소수자 혐오의 차별사회가 있다. 소득 차이로 인한 교육 불평등이 계층 간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극심한 양극화 사회가 있다.

그러나 보수 양당은 기존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유지하는 것에 골몰해왔다. 개혁을 표방한 문재인 정부도 결국인 불로소득과 교육 불평등의 적극적 수혜자인 것이 밝혀졌다. 또 민주 정부로 기억되는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비정규직 제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며, 오늘날 불안정 사회의 거대한 책임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경쟁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한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청년세대의 분노를 실체 없는 기득권 세대에게 되돌리거나, 사회적 차별의 피해자인 여성에게 전가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세대 담론으로 사회모순을 은폐하는 데에 급급한 보수 양당은 16세기 중세 ‘마녀’사냥을 자행한 구체제 종교 권력의 지배자들과 오버랩된다.

한국 사회는 그동안 우리 삶이 실패한 것은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학습시켜왔다. 세대론은 다시 한 번 시대의 문제를 우리 스스로에게 전가하고 있다. 세대론이 촉발한 논쟁은 을과 을의 싸움을 부추기고, 더이상 지금과 같은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이들의 희망은 더욱 멀어지고 있다.

한국 사회를 넘어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 위기에 놓여 있다. 모두에게 풍요와 자유를 안겨주겠다고 약속한 탄소 자본주의는 성장할수록 사회적 격차를 벌여놓는 대신, 지구 생태계 멸종의 시한을 6년을 채 남겨두지 않았다. 코로나19가 시장경제를 마비시키자, 모든 삶을 시장에 의존해왔던 이들의 삶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모두의 존엄한 삶을 위해 제공돼야 하는 필수적 권리를 위계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하다 보니, 위기는 아래로 고였고, 더 차별받는 이들의 순서대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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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가 지난 4월23일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속 활동가가 피켓을 든 모습. 사진=청년·학생 시국선언 원탁회의

 

왜 세대로 환원되길 거부하는가

4월 30일, 이런 문제의식에 기반해 청년들이 모여 “오늘의 시대는 실패했다. 세대가 아닌 시대를 교체하라”는 요구로 시국선언을 발표했다.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으며, 자본주의 체제와 맞서지 않는 정치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연일 청년들을 호명하는 세대론의 주인공은 청년세대가 아닌, 이를 통해 기존 정치를 답습하는 보수 양당이라고 폭로했다. 진정한 문제는 역차별과 불공정이 아니라, 코앞에 닥친 기후위기이자, 우리가 오늘도 경험하고 있는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삶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왜 세대로 환원되길 거부하는가. 오히려 세대 담론은 우리가 처한 사회적 조건을 오직 나이의 문제로 협소하게 가두고, 사회적 모순에 고통받는 우리들이 이 모순에 대해 발언할 정치적 가능성을 차단한다. 또 고스펙을 요구하는 공사 시험을 준비하는 청년들이 요구하는 공정담론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부모자산 차이가 주는 경쟁력의 차이로 인해 스펙 경쟁에서 패배한 더 많은 청년들을 배제한 ‘그들만의 리그’일 뿐이다.

분명 세대론은 언제나 그랬듯 기존 정치의 무능함이 극명히 드러났을 때, 새로운 정치적 주체를 출현시키는 기능을 해왔다. 하지만 항상 그랬듯 새롭게 출현한 젊은 세대들은 금세 기존 정치와 동화됐다. 그들이 맞서야 할 것은 구세대가 아닌 구시대였기 때문이다. 실패의 반복은 공멸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시국선언의 제목도 “오늘의 시대는 실패했다. 세대가 아닌 시대를 교체하라”이다. 여기, 세대가 아닌 시대를 교체하는 청년들이 세상에 나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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