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위하여…” 
“국익 기여해 달라” 원포인트 사면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위한 국가적 선택
"동계올림픽 3修 평창유치, 李 전 회장 역할 절실" (2009년 12월)

“반도체 전쟁 격화 이재용 사면해야”
이재용 부회장에게 나라 위해 기여할 기회를 주자
"이재용 사면해 반도체 살리고, 백신 '민간외교' 맡겨야“
판 뒤집었던 '평창 유치' 때처럼… 기업인들 인맥 총동원해야 (2021년 4월)

▲2009년 12월 당시 살아있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면을 다룬 보도 갈무리.
▲2009년 12월 당시 살아있던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사면을 다룬 보도 갈무리.

 

2009년엔 고 이건희 전 삼성전자 회장을 사면해야 한다는 보도였다. 이 전 회장이 배임·조세포탈로 유죄를 선고받은 지 4개월 뒤다. 언론은 ‘국익을 위해서’라고 이유를 댔고 나아가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들었다. “국제올림픽위원인 이 전 회장을 사면해 올림픽 유치에 힘쓰게 하자”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12년 후 고유명사만 바뀐 채 연일 유력지 헤드라인을 장식한다. 이건희는 이재용으로, 평창올림픽은 반도체 전쟁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코로나19 백신’이 자리를 차지했다. ‘국제적으로 발이 넓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백신 기술을 보유한 제약업체 최고경영진들을 만나 백신 수급 문제를 풀 수 있으니 사면해야 한단 소리다. 

지난 1월 이 부회장이 뇌물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최종 징역 2년 6개월을 받고 구속됐다. 이후 3개월 간 언론 보도를 살펴본 결과 이 부회장 사면을 바라고, 그의 상속세를 걱정하며, 그를 국익의 수호자로 간주한 기사가 사면론을 견제한 기사량을 압도했다. 언론은 삼성, 재계의 스피커가 됐다.

▲4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을 다룬 보도 갈무리.
▲4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을 다룬 보도 갈무리.

● “삼성전자, 반도체, 국가경제=이재용”

‘이재용 사면’ 보도가 나온 진 11일째다. 지난 14일 한국경제의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장 인터뷰가 신호탄이었다. 손 회장은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이 벌어졌는데 이 부회장이 아무 역할을 못 하는 상황이 계속돼선 안 된다”고 말했다. 15일엔 오규석 부산 기장군수가 대통령에게 사면 호소문을 보냈다. 14~15일 간 네이버 기사 제휴 매체에서만 보도 46건이 쏟아졌다. 

사면보도 특징은 물량공세다. 누군가 공개로 사면을 요구하면 곧 보도됐다. 16일 5개 경제 단체장이 홍남기 부총리에 사면을 건의하니 17일 종합일간지 1면에까지 기사가 났다. 이에 홍 부총리가 19일 “건의를 관계기관에 전달했다”고 답하니 또 기사가 쏟아졌다. 16~17일 동안  80여개(네이버 제휴 매체), 18~19일 동안만 140여개다. 21일 조계종 주지승들이 사면을 요구한 직후엔 기사 30개가 쏟아졌다. 

보도는 삼성전자 경영 능력을 한심한 수준으로 낮췄다. 현재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중·미 무역 갈등이 심각하다며 국내 반도체 산업의 투자를 강조하는데 “반도체 경쟁에 신속 대응하고 투자하기 위해선 이 부회장이 경영을 진두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도체 패권 뺏길라”(국민일보) “반도체 위기에 곳곳서 목소리”(뉴시스) “반도체 전쟁 치열한데 수장이 없다”(대한경제) 등이 기사 제목 예다.

삼성전자 임원은 부문별 대표이사 3명을 포함해 사장 12명, 부사장 69명, 전무 120여명 등 총 1000명이 넘는다. 매출·영업이익 실적도 이 부회장 구속과 무관하다. 이 부회장이 구속된 2017년 삼성전자는 매출 74조2600억원으로 전년도 대비 145%, 영업이익은 35조2000억원으로 전년도보다 258% 증가하며 사상 최대 실적을 찍었다. 2018년에도 매출, 영업이익이 늘며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했다. 이 부회장이 구속된 올해 1분기도 연결회계기준 매출 65조원, 영업이익 9조3000억원을 기록했다.

김우찬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언론이 ‘회사’와 ‘총수’를 호도한다.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증설한다거나 특정 거래를 성사시키는 일은 이 부회장만이 아니라 권한을 가진 임원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아 하고, 하고 있다”며 “상식적으로 (사업 관계자가) 관련 대화를 위해 이 부회장에게 연락하겠느냐, 사장 등 관련 임원에게 하겠느냐. 2009년 이건희 회장 사면 때와 똑같아 기시감이 든다”고 꼬집었다. 

▲이 부회장 '백신 특사' 사면을 요구한 보도 헤드라인 갈무리.
▲이 부회장 '백신 특사' 사면을 요구한 보도 헤드라인 갈무리.

● 실체 모호 ‘백신 해결사 이재용’

‘백신 특사’ 보도도 논란이다. 언론은 22일부터 “막강한 국제적 인맥을 가진 이 부회장이 백신 확보에 역할을 할 수 있으니 사면해야 한다”는 기사를 양산했다. “이재용, 정부에 화이자 회장 연결해줘 협상 실마리”(동아일보), “장관도 안 통한 화이자, 홀로 뚫은 이 사람.. ‘이재용 없었다면’”(머니투데이) 등이다. 

지난해 12월 정부 관계자도 화이자 고위임원을 만날 수 없는 상태에서 이 부회장이 인맥을 통해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내용이다. 기사는 이 부회장이 지난 1월 사업차 들리려던 아랍에미리트와 백신 물량 공유를 논의하려 했지만 구속되면서 무산됐다고도 전했다. 모두 익명 재계 관계자 인용 보도다. 

신영대 더불어민주당 대변인은 23일 이와 관련 “대한민국 정부가 재벌총수 한 사람에 의해 백신을 확보하고 못하고 하는 상황이 되겠느냐”며 “적절하지 않은 언론사의 재벌 옹호하기 같다”고 반박했다. 

● ‘화끈’한 칼럼 “반도체가 이재용 부른다”

사설·칼럼의 어조는 노골적이다. 종합일간지, 경제지, 온라인신문 등 매체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반도체가 이재용을 부른다 (아주경제 19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장기 구금은 매국이다 (스카이데일리 19일) 
세계는 반도체 전쟁, 이재용 사면 머뭇거릴 이유 없다 (매일경제 19일 사설)
[이하경 칼럼] 이재용 부회장에게 나라 위해 기여할 기회를 주자 (중앙일보 19일)
반도체전쟁, 이재용을 선봉장에 세워라 (중소기업신문 22일)
박근혜 이명박 이재용 사면… 文, 미래 위해 결단하라 (동아일보 23일 사설)

이 부회장에 이입하는 경향도 보였다. “수척해진 이재용” 보도다. 23일 불법 경영권 승계 의혹 사건 재판에 출석한 이 부회장을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고 동시에 표현한 매체만 최소 17곳이다. 지난 3월 이 부회장이 수감 2달여 째 급성 충무염으로 병원 치료를 받다가 복귀한 후 처음 모습을 드러내자 이같이 묘사했다. 머니투데이는 “몸도 마음도 지친 이재용”을 언급하며 “(방역 마스크 밑으로) 수척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 부회장은 구치소 수감 도중 급성 충수염 수술을 받아 체중이 8kg 빠졌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석 달 만에 수척해진 이재용(한국경제)
몸도 마음도 지친 이재용…4년 재판 끝에 다시 시작된 '마라톤 재판'(머니투데이)
8kg 빠진 이재용, 구속 후 3개월만에 법정 출석..."재판 연기 감사드린다" (조선비즈)
헝클어진 머리에 수척한 이재용…변호인 "재판부 덕에 위급 상황 넘겼다 (데일리안)

▲23일 한국경제 "석달 만에 수척해진 이재용" 기사 일부.
▲23일 한국경제 "석달 만에 수척해진 이재용" 기사 일부.

국민들도 사면을 바란다는 근거도 마련됐다. 21일 데일리안의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 70.0%가 ‘광복절 이 부회장 특사‘에 대해 매우 찬성(51.8%)하거나 찬성하는 편(18.2%)이라고 답한 것. 데일리안은 이를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특히 백신 수급을 위한 민간 외교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영남일보, 매일경제, 뉴스1 등 여러 매체가 받아쓰거나 사설 글감으로도 활용했다. 

▲4월21일 데일리안 보도 갈무리.
▲4월21일 데일리안 보도 갈무리.

● “재벌 봐주기 역사 반복하자는 언론들”

이 부회장은 86여억원 뇌물을 대통령에게 주고 회삿돈을 횡령해 5년에 이르는 재판 끝에 2년 6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2017년 10억원을 횡령한 삼성물산 직원이 징역 4년 실형을 받은 사례에 비춰 범죄 금액에 비해 형량이 적은 편이다. 당시 정부가 이 부회장의 최대 현안이었던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이 부회장에게 유리하게 성사되도록 개입한 사실은 추후 국정농단 사건 수사로 확인됐다. 

불법 경영권 승계의 연원을 따지면 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총수 일가는 1999년 부를 증식하는 과정에서 주당 5만5000원 이상 책정될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를 7150원에 매입해 삼성SDS에 1539억원 넘는 손해를 끼쳤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삼성 계열사 주가조작·분식회계 사건도 이 연장선에 있다. 이건희 회장 사후 최소 비용으로 총수 일가 최대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이 부회장이 삼성물산, 제일모직 등 주가를 조작했고 분식회계도 저질렀다고 기소됐다.

2017년 박영수 특검은 이 부회장에 징역 12년을 구형하며 “이 사건은 전형적인 정경유착에 따른 부패범죄로 국민주권 원칙 및 경제 민주화라는 헌법 가치를 훼손했다”고 말했다. 2016년 매주 열린 국정농단 규탄 촛불집회에서도 ‘재벌 특혜 그만’ ‘정경유착 엄벌’ ‘삼성공화국 해체’ 등의 구호가 터져나왔다. “회사에 납부할 2400원을 빠트렸다며 버스 노동자는 해고되지만 재벌은 풀려난다”며 만인에 평등한 사법 정의도 요구했다. 

언론이 이 부회장 사면을 요구하는 근거는 경제적으로 우월한 지위 밖에 없다. 이를 이유로 뇌물 범죄 수감자를 특별 사면하는 건 특혜다. 언론은 엄밀한 근거도 없이 재계 1위 그룹 총수의 ‘존재’가 특정 산업을 성장시키고 국익을 늘린다는 왜곡을 반복했다.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재계 관계자 전언만으로 이 부회장을 ‘백신 수급 해결사’로 격상시켰다. 이 과정에 사법 정의와 사회 평등이란 공공선의 고려는 없었다. 김우찬 소장은 “이제야 재벌 범법행위를 엄중히 수사하고 처벌함으로써 예방 효과를 내려고 했는데 언론은 과거로 회귀해 재벌 봐주기 역사를 반복하자고 말한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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