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때도 아니고 지금, 일일 생활권의 한국에서 왕복 네 시간 통학길을 신발을 의지 삼아 걸어다니는 학생이 있다면 보통 이해를 못할 것이다. 더구나 버스가 잘 다니는 곳인데도 걸어다닌다면, 더 오해할 법하다. 차비를 못낼 만큼 집안 환경이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담임 선생님의 확인 결과, 그 이유가 가정 형편은 아니었다. 아니 스스로 걷기가 좋다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어떤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다. 요즘에는 다이어트를 하기 위해 일부러 걷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복 네 시간은 좀 심한 듯하다. 맨날 지각을 하는 데도 그 일을 고집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매번 혼나고 꾸중을 듣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며, 성적은 하향 곡선을 그리는 데 말이다.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고집하는 이가 바로 영화 ‘걷기왕’의 주인공 이만복(심은경)이었다. 걷기라면 산책을 떠올릴 수 있고, 속도감이 지배하는 빨리빨리 대한민국에서 느림의 철학을 전할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만복이는 애초에 관객들이 예상하는 것과 달리 낭만적인 이유 때문에 걷기를 고집하는 게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필사적인 생존의 문제였다. 만복이가 걸어다닌 이유는 멀미 때문이었다. 우리는 대개 멀미 때문에 버스를 타지 않으면 별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패치를 붙이면 되지 않을까.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멀미가 별스럽지 않은 증세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내준다. 한 사람의 인생이나 주변 사람의 삶까지 바꿔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 영화 ‘걷기왕’ 스틸컷
선천성 멀미증후군이 있는 만복(심은경)은 네 살 때부터 이동수단을 타지 못하고 오로지 걸어서만 이동해야 했다. 그러므로 먼 동네를 갈수가 없었다. 만복이가 사는 동네가 강화도에 있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준다. 어쩌면 강화도는 육지와 다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일지 몰랐다. 만약 만복이가 육지에서 꽤 떨어진 섬에서 태어났다면 평생 섬을 벗어나지 못했을 지 모른다. 갈 수 있는 곳이 적다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꿈이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와 공포감을 먼저 학습하고 만들기도 한다. 이동의 자유가 사실상 박탈되기 때문이다.

일단 멀미는 장애라고 보아야 한다. 구토 증세가 나타나기 때문에 기능성 위장장애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좀 더 포괄적이다. 이동과 균형을 담당하는 전정기관에 문제가 있을 때 멀미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멀미는 불규칙한 몸의 요동 때문에 어지러움과 두통, 구토 증세를 느끼는 현상이다. 몸이 느끼는 위치 신호와 눈이 보는 사물의 풍경 신호가 다르면 멀미 증세가 나타난다. 사고나 염증으로 신호를 뇌에 잘 보내지 못해서 전정기관의 혼란으로 멀미 증세를 갖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멀미가 잘 나는 사람은 화학요법이나 수술, 방사선 치료를 했을 때 메스꺼움을 더 잘 느낀다고 한다. 편두통, 임신, 머리 손상일 때도 고통은 더 심화된다는 것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2배 많고 가족력에 따른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멀미 증세가 심해지면, 무감정이나 우울증 증세에 빠진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인관계 장애도 일으킨다. 심한 사람들은 만복이처럼 이동수단을 타기만 하면 고통을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도 평생 동안 이동수단을 타지 못한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이며, 그것은 삶을 왜곡시킬 수 있다. 영화는 이러한 상황을 만복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통학거리가 멀기 때문에 오래 걸어야 하는 만복이는 항상 지각하고 문제 학생으로 규정된다. 더구나 피곤하고 통학거리가 오래 걸려 학습량이 현저히 떨어지므로 성적도 바닥이다. 사랑하는 이성과 같이 이동 수단을 타지 못한다. 평소 짝사랑해왔던 배달부 청년이 모처럼 태워준다고 하여 스쿠터에 올랐지만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 어떤 고통도 참아야 했다. 잘 보여야 하지만 개인의 인내를 넘어서는 문제였다. 결국 오토바이 위에서 구토를 하고 만다. 잘 관리하려던 첫인상을 다 구긴 셈이 되었다. 육상부에서 경보를 하게 되었지만, 결국 경기를 위해 체육부 동료들과 같이 버스라는 이동교통수단을 타야 했다. 멀미 때문에 결국 다른 이들에까지 피해를 주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진출하게 된 본선 경기를 앞두고는 경기장이 있는 서울까지 전날 걸어서 도착하려 하는데, 70km를 걷는 바람에 우려 했던대로 콘디션 조절에 실패한다. 영화에서는 너무 의욕이 앞서는 비정상적인 상태로 이를 우회적으로 담아내기에 이르렀다.

아쉬운 점은 이 영화가 만복이를 비정상적일 정도로 밝고 경쾌한 캐릭터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장애인을 우울하게 그려낼 의무는 없지만, 인간적인 좌절과 고통도 좀 더 담아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한다. 학창 시절 멀미 증세가 있는 친구들의 어려움을 우리는 대부분 별스럽지 않게 대했을 지 모른다. 꼭 장애가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전정 기관 등이 예민할 뿐이다.

▲ 영화 ‘걷기왕’ 스틸컷
그러나 자동차를 타지 못하는 정도의 멀미라면 학교 생활만이 아니라 대인 관계도 잘 맺을 수 없는 현대사회이다. 직장에 나거거나 업무 수행을 하는데도 장애 요인이 된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멀미 증세가 있는 이들을 장애의 관점으로 보지 않아왔다. 이는 소수자에 대한 배려만이 아니라 공공적 정책의 부재를 의미했다. 이로써 현대 사회는 자동차 등의 이동 수단에 오르내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오로지 그것은 개인의 문제에 불과하며, 개인들도 그곳을 숨기거나 자신의 탓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귀 뒤에 패치만 붙인다고 해결되지 않는 중증의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다리가 언제까지나 튼튼하게 버텨준다는 보장도 없으니 언제든 꼼짝도 못할 일이다. 멀미에는 항히스타민과 히오스신이라는 약물이 처치된다는 점에서 개인이 단지 예방하고 견딘다고 해결될 수 없는 면이 있다.

그동안 멀미 증세가 있는 이들에 대해서 무관심했던 면이 사실일 것이다. 그들의 전체 면모가 제대로 파악조차 안 되어왔다. 그들은 소수일지라도 인권의 주체이다. 행복추구권이 보장되어야할 국민이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뿐더러 사회 경제적인 활동에서 제한을 당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의료적인 차원이나 조그만 배려가 있다면 훨씬 좋을 것이다. 영화 ‘걷기왕’에서 만복이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경보라는 것도 해볼 수가 있었다. 이러한 배려조차 현실에서 멀미증세가 있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을 지 의문일 수밖에 없다. 물론 영화에서도 삶의 깨달음을 얻어가는 과정을 위해 경보 경기를 잘 해내는 모습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이는 멀미 장애를 갖고 있는 이들의 현실을 반영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적어도 이제 영화 속 만복이처럼 낙인 효과 때문에 문제 학생이 되거나 열패자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 때문에라도 청소년들에 대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멀미는 가벼운 개인 증세가 아니라 구조적인 전정기관 장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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