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릇 인생을 낭비하는 젊은이는 어느 시대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젊은 세대는 그 낭비를 되레 자랑하고 자부한다. 미국 학자가 책을 읽지 않는 디지털 세대를 ‘가장 멍청한 세대’로 이름붙인 이유다.

미국과 달리 ‘헬 조선’의 대한민국에서 젊은 세대를 싸잡아 훈계할 뜻은 전혀 없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있기에 더 그렇다. 하지만 더는 지켜만 볼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보라. 고 백남기의 죽음을 조소하고 유가족을 위로하기는커녕 ‘부친 살해’ 혐의까지 제기하는 반인간적 ‘문자’들이 난무한다. 딴은 고인이 쓰러진 다음날 이미 ‘(속보) 썰매’ 제하의 글이 나타났다. “광화문 스키월드에서 난데없이 썰매를 신나게 끌어주고 있다, 친구들과 진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모습”이란다. 농민 생존권을 요구하다가 ‘공권력’의 물대포를 맞고 당시 이미 사실상 사망한 예순아홉 살 농민에 대한 야만적 조롱이다.

고인이 끝내 숨진 직후에도 해괴한 글이 올라왔다. 어느 대학교 정치외교학과 3학년 학생의 글은 표제부터 ‘백남기 사망-지긋지긋한 시체팔이’였다. 조중동의 논리를 고스란히 체화했다. 조중동의 논리에 갇혀 상대를 ‘악마화’ 하는 전형적 보기다(‘악마와 민중 사이’ 경향신문 2016년 10월17일자).

이 젊은이들의 사고가 쉽게 바뀌리라는 환상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쓴다. 누군가가 그들을 ‘조중동 우물’에 가둬두고, ‘여론 물타기’에 이용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TV토론에 출연해 ‘조중동 논리’에 갇힐 위험성을 설명도 했다. 많은 이들이 보는 매체여서다. 하지만 그조차 왜곡하는 누군가가 있다.

▲ 게티이미지.
가령 국민연금을 주제로 한 KBS 심야토론에서 그나마 있는 복지마저 줄이는 박근혜의 정책을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갈등으로 오도하는 ‘조중동 논리’를 비판했다. 그런데 토론의 극히 일부인 1분11초 동영상을 올린 ‘개밥’은 “개소리하다가 털리는 손석춘ㅋㅋㅋ”이란 제목을 붙였다. 토론 전체의 분위기와 전혀 다른 주장이지만, 짧은 동영상 끝자락은 내가 할 말이 없어 더듬는 듯 교묘히 ‘편집’했다. 그 동영상이 마치 ‘대안도 없이 권력만 비판한다’고 들씌우는 세력의 선전물이 될까 우려해 그걸 포탈에 게시한 ‘다음’에 이의를 제기할 생각도 했지만 그냥 넘겨왔다. 그런데 최근 조회가 20만을 넘고 있다. 1년이 지난 영상인데도 끊임없이 조회를 ‘경신’한다. 그들 중에 토론의 전체 영상을 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인간성을 잃어가는 일부 네티즌을 보면서 문득 ‘개밥’의 정체가 궁금했다. ‘인터넷 심리공작’을 펴는 조직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알바’이기를 바라기도 했다. ‘헬 조선’ 시대에 이해할 수도 있어서다. 그렇지 않다면, ‘개밥’의 가슴이 궁금하다. 적어도 그는 토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았을 텐데 왜 실제를 왜곡하는 동영상을 올릴까? 그렇게 해서 대체 ‘개밥’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까. 복지의 보편화와 확대가 정말 싫을까. 그들 뒤에는 누가 숨어 있을까.

나는 권력과 자본을 지닌 ‘금수저’들이나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고액 연봉을 누리는 ‘지식인’ 따위가 진보적 대안이나 민중대회를 비아냥대는 작태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의 잇속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패륜적 글을 쏟아 내거나 진실을 왜곡하는 동영상을 올리는 ‘네티즌’ 다수는 비정규직이나 영세 자영업으로 살아갈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바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애면글면 운동하는 이들을 조롱하는 풍경은 희극적인 비극이다.

무릇 글 쓰는 행위는 익명이라도 자신의 인격에 영향을 끼친다. 말과 글은 인간됨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한 말과 쓴 글은 인성을 형성한다. 충정 담아 쓴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전혀 도움이 안 될 말과 글, 동영상을 인터넷에 올릴 시간이 아직 있다면, 마을이나 학교 도서관을 찾아 ‘우물’에 갇힌 자신을 건져줄 책들과 만나기를 간곡히 권한다. 젊은이가 하나 뿐인 인생을 가장 멍청하게 탕진해가는 풍경을 지켜만 보는 것은 몹시 가슴 아픈 일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