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는 열악한 근무조건, 낮은 임금 뿐 아니라 신분보장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어서 권력의 눈에 벗어나면 회사의 압력으로 즉각 해고되기 일수였다. 또한 언론의 자유가 거의 없다시피한 상황에서 기자는 기자로서 제역할을 다하기 어려웠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노조결성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74년 3월6일 언론사에서는 처음으로 동아일보에서 노조가 결성됐다. 당시 전국출판노조 동아일보지부장을 맡았던 서울산업대학 조학래교수(산업경영학과)는 당시 노조를 결성하게 된 배경에 대해 “동아방송에서 기자를 PD와 영업직으로 발령을 낸 보복적인 인사조치가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동아일보 기자들 33명은 노조설립신고를 하기 하루전인 74년3월5일 장충동에 있는 현 한겨레신문 사장인 김두식기자의 집에 모여 노조결성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도 나왔지만 일단 노조를 결성하기로 했다. 노조설립신고 절차를 잘 몰라 노조 사무장을 맡게된 정영일 기자가 취재를 하고 다음날 즉각 서울시에 노조설립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3월6일 노조가 결성되자마자 사측은 지부장을 포함한 13명을 해고조치했다. 예상된 수순이었다. 그러나 조교수는 당시 해고를 우려해 앞에 나서는 것을 두려워하는 기자는 없었다고 말했다.

“사측은 해고된 자는 조합원자격이 없다며 책상을 치워버렸지만 우리는 계속적으로 출근투쟁을 벌였다. 무교동, 광화문 일대의 여관을 사무실로 잡아 연일 회의를 하고 당번을 정해 철야로 유인물을 만들어냈고 회사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 동아일보 앞에서 시민들을 상대로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당시 각 언론사 기자들은 우리에게 돈을 보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해고된 13명의 노조간부들과 해고의 부당성을 주장하다 이어서 해고된 기자들은 사측을 상대로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했고 소송 진행중에 사측이 두달만에 전원 복직시켜 노조 결성에 따른 해고 파동은 일단 마무리됐다. 그러나 조교수는 당시만해도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는게 가슴아팠다고 털어놓았다. 동아일보에 대한 애정때문이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사측이 소송진행중에 사실상 백기를 든 것은 사측 변호사가 재판을 진행해봤자 명백히 부당노동행위로 질 것이 뻔하니 인사조치를 백지화하라고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는 이어 계속적으로 노조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언론자유활동을 전면에 들고 나서면 사측과 권력 양쪽에서 탄압을 받을 것이 뻔한 노릇이어서 전술적으로 근로조건과 임금문제를 주로 요구했다. 노조설립 이후 임금수준은 상당히 올라갔다.”

당시 동아일보노조지부장이었던 조학래교수는 노조결성 이후 10월24일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따른 기자 대량해직때 함께 해직됐고 뒤늦게 공부를 시작해 교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걷게 됐다.

“우리는 그 당시 상황에서 적절한 역할을 충실히 했고 자랑스럽게 해직된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지금은 근로조건이나 임금수준이 상당히 좋아졌으나 언론의 자유는 기자들이 계속해서 실현시켜 나가야 할 가치가 아니겠느냐”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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