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3월10일,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규제를 놓고 “우리가 쳐부술 원수” “암덩어리”라고 묘사하며 완화를 주문했다. 당시 민주당은 “대선 공약으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는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민주당은 ‘박근혜식 규제완화 반대’ 기조를 분명히 했다. 문재인 대선 캠프는 규제프리존법에 찬성하는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후보를 두고 “규제프리존법은 대기업 청부입법”이라며 비판했다.

규제프리존법은 수도권을 제외한 14개 시도에 전략산업을 지정해 규제를 풀어주는 제도를 말한다. 그런데 이 법이 현재 문재인 정부의 ‘규제 샌드박스’ 정책으로 통합됐다. ‘규제 샌드박스’는 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정보통신‧산업융합‧금융‧지역전략사업 등 분야 규제완화 정책에 붙인 이름이다. ‘샌드박스’란 아이들이 맘껏 뛰노는 모래놀이터로, 정부가 새 제품이나 서비스를 출시할 때 일정 조건 하에 기존 규제를 적용하지 않거나 유예해준다는 취지다.

정부는 지난 1월 규제완화 법안인 규제 샌드박스 4법 시행을 알리며 “우리는 규제 샌드박스를 도입 또는 검토 중인 세계 20여개 국가와 비교해 가장 앞선 제도를 가지게 됐다”고 발표했다. 물론 현 정부는 규제 샌드박스가 박근혜 정부의 규제완화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신산업‧신기술’을 대상으로 하며, 규제프리존법은 보건의료 분야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다.

그러나 시민사회는 “박근혜 정부 땐 민주당도 의료영리화란 이유로 반대했던 것을 정부가 더 공격적으로 행하고 있다. 단지 문재인 정부는 ‘4차 산업혁명’이란 미명 아래 추진한다는 점이 다른 뿐”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지난해 하반기 규제 샌드박스 5법 중 4개 법안이 통과됐고, 이 가운데 3개(정보통신융합법‧산업융합촉진법‧규제프리존법)는 지난 1월부터 시행 중이다. 나머지 하나(금융혁신지원 특별법)는 4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 혁신 토론회 '규제혁신, 내 삶을 바꾸는 힘'에서 앞에 놓인 '규제 샌드박스'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1월22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규제 혁신 토론회 '규제혁신, 내 삶을 바꾸는 힘'에서 앞에 놓인 '규제 샌드박스'를 바라보고 있다. ⓒ연합뉴스

‘샌드박스’ 사업, 의료공공성 둑에 구멍 될까

정부의 의료 규제완화도 ‘4차 산업혁명’의 이름을 둘렀다. 샌드박스 규제완화 방식은 △실증특례 △신속처리 △임시허가로 요약할 수 있다. ‘신속처리’는 기업들이 관련 규제 유무를 문의한 뒤 정부가 30일 안에 답하지 않으면 관련 규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임시허가’는 신제품과 서비스 출시 후 최대 4년까지 규제에서 예외로 쳐준다.

‘실증특례’는 신제품이나 서비스 관련 법령이 모호하거나 불합리하면 기존에 비해 검증 문턱을 낮춰주는 방식이다. 보건의료분야 영리화는 ‘실증특례’를 중심으로 속속 법규제에서 풀려나고 있다. 대통령 직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국생위) 민간위원 신영전 교수는 지난달 19일 ‘규제 샌드박스’ 결정이 국생위 취지에 반하는 의료 규제완화라며 사퇴했다.

‘샌드박스 의료영리화’ 1호는 질병유전자 검사 서비스다. 산업통산자원부 산하 신설 규제특례심의위원회는 지난달 11일 의료기관이 아닌 유전체 기업 ‘마크로젠’이 질병 유전자 검사 서비스를 시행하도록 허용했다.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은 비의료기관이 실시할 수 있는 유전자검사 항목을 한정한다. 질병과 유전의 관계가 복잡하고, 기존 소비자들은 관련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기술이 오·남용된다는 우려에서다.

또 다른 규제 샌드박스는 심장건강관리서비스 민영화다. 바이오 스타트업 ‘휴이노’와 고려대학교 안암병원이 심장 질환자를 위한 손목시계형 심전도 장치 및 병원방문 안내 서비스에 특례를 신청해 올해 허용됐다. 이는 현행 의료법이 금지하는 원격진료 소지가 크다. 연구공동체 ‘건강과대안’ 변혜진 연구원은 “같은 기술을 쓰는 애플워치4는 심장질환자가 쓰지 못하도록 경고하는 등 환자용이 아님을 명확히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중앙정부가 나서 환자들이 사용하도록 하는 셈”이라고 했다. 또 다른 샌드박스 허용 사업인 ‘임상시험 매칭 어플리케이션’도 지금껏 환자 몸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내용과 형식을 규제해왔던 임상시험 광고를 온라인에 풀어놓는 서비스다.

의료빅데이터 플랫폼 사업, 개인정보 보호는 뒷전

정부가 추진하는 의료영리화 양대 축 가운데 ‘규제 샌드박스’에 이은 다른 하나는 ‘보건의료 빅 데이터 플랫폼 시범사업’이다.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질병관리본부, 국립암센터 등 4개 공공기관이 가진 진료 내역과 건강검진 결과 등 환자 기록을 합쳐 연구 ‘등’에 활용한다는 취지다. 문제는 환자 개인정보를 어떻게 동의 받아 활용하고 보호할지를 두고 안전장치가 미비하다는 사실이다.

보건의료단체들은 “그 자체로 의료법 위반일 뿐더러, 의료와 정보통신기술을 연계한다는 명분 아래 환자의 민감정보를 민간 기업에 넘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법은 환자 개인정보와 의무 진료 기록을 정당한 사유 혹은 동의 없이 누출·변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규제완화를 통한 신산업 일자리 창출을 공언하나, 보건의료분야의 경우 규제완화가 오히려 이에 역행한다는 지적도 있다. 무인 의료기술 시장화를 촉진할 뿐 일자리와 큰 관련이 없다는 것이다.

제주영리병원 철회 및 의료민영화 저지 범국민운동본부(범국본)는 “지금 정부가 상업화하려는 보건의료 영역들은 고용을 거의 늘리지 않는 사업들”이라고 주장하며 인력 규모가 열악한 보건의료체계에 오히려 자동화·기계화 추세를 부추긴다고 전망하고 있다. 범국본은 규제 샌드박스 법안이 통과한 지난달 성명을 내고 “의료 상업화와 무차별 규제완화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모순이며, 문재인 정부가 강조한 사람중심 경제와도 관련이 없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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