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월 일본의 ‘국민기금’이 비밀리에 위안부 피해자 7명을 만나 이른바 ‘위로금’을 전달한 사건이 있었다. 가네히라 테루코(金平輝子) 전 도쿄도부지사 등 ‘아시아여성기금방한단’ 6인은 한국정부와 언론에 알리지 않고 서울에 위치한 호텔과 자택 등에서 몰래 피해자들을 만나 ‘위로금’(약 1천5백만원)과 총리 서한 등을 몰래 전달했다.

기금측은 ‘한국에서의 사업개시에 관한 가네히라 테루코 방한단장의 알림’을 통해 피해자 ‘가네다 키미코’(기금측은 피해자명을 이렇게 적시함)’씨로부터 “기금 이사장에게 기금의 사업을 받아 들이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가 (1996년 12월16일)도착”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금은 1996년 7월 와다 하루키 교수 등 5명을 한국에 파견해 피해자 10여명을 만나게 하고 “국민기금을 통해 일본 정부가 피해자 1인당 제공하는 2백만엔(약 1천50백만원)을 받으면 일본 정부가 별도로 3백만엔씩의 위로금을 더 지급할 것”이라고 기금 수령을 종용했다. 한국 정부와 피해자 대부분이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위로금을 반대하는 상황에서 기금 인사들의 이같은 행태도 문제였지만, 그들이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에 대한 언설도 거짓이었다. 기금 관계자들이 추가 지급하겠다고 한 3백만엔은 고령의 피해자들이 입원하게 될 경우의 치료비 등 향후 10년간 발생할 수 있는 복지 지원이었다.

고령이 된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매수’에 가까운 이같은 행태가 드러나면서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를 비롯한 여성·인권 단체와 피해자들이 반발했고, 국민기금은 이를 해명하는 기자회견을 할 수밖에 없었다.

▲ 2016년 7월 화해치유재단 강행을 규탄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대협. 사진=민중의소리.
▲ 2016년 7월 화해치유재단 강행을 규탄하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정대협. 사진=민중의소리.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기금이 ODA라는 일본

국민기금의 뿌리는 ‘고노 담화’이다. 1993년 8월4일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 결과와 함께 발표된 고노 내각관방장관의 담화는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군이 주도한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 운영이 ‘군의 관여’로 탈바꿈했고 법적 책임이 아닌 도의적 책임만 지면 된다는 입장이 국민기금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는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으로 모든 법적 책임이 끝났고 ‘국민기금’으로 도의적 책임까지 끝났다는 입장을 지금껏 고수하고 있다.

1993년 고노 담화 발표 이후부터 시미즈 스미코(일본사회당 의원), 하로나카 와카코(공명당 의원) 우에노 지즈코 등 10명이 민간모금을 통한 위로금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지만, 정대협은 물론이고 일본의 시민사회에서도 민간모금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나서면서 첫번째 국민기금 모금 시도는 중단됐다. 그러나 1994년 6월 자민, 사회, 사키가케의 3당 연립, 무라야마 내각이 출범하면서 ‘구 일본군 종군 위안부 보상에 대신하는 조치’가 발표됐다. “민간 모금을 우선 지원 모체로 하여 기금과 같은 기관을 설치하고 이 기관은 민간기업, 노동조합, 개인 등으로부터 모금을 해서 한국과 필리핀 등의 전 위안부들에게 위로금 명목의 일시금을 지급하며, 정부는 운영등에 필요한 사무경비를 부담하는 방안”을 제시 한 것이다.(스즈키 유코. 2013년, ‘국민기금 반대운동의 역사적 경위’‘그들은 왜 일본군 위안부를 공격하는가’ 후마니타스)

1995년 6월14일 일본정부가 발표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우호기금’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전 종군위안부를 위해 국민과 정부의 협력 아래 다음과 같은 사업을 벌인다.

(1) 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국민적인 보상을 위해 민간으로부터 기금을 모금한다. (2) 전 종군위안부에 대한 의료, 복지 등 도움이 되는 사업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자금 등으로 기금을 지원한다. (3) 이 사업을 실시할 때 정부는 전 종군위안부에게 국가 차원에서 솔직한 반성과 사죄의 마음을 표명한다. (4) 정부는 과거 종군위안부의 역사자료를 정리해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다.

2. 여성의 명예와 존엄과 관련한 사업으로서, 앞서 말한 (2)에 맞춰 여성에 대한 폭력 등 오늘날과 같은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사업을 실시하는 것에 대해 정부의 자금 등으로 기금을 지원한다.

국민기금 사업의 내용은 일본 정부가 아닌 일본 국민이 모금한 위로금(1인당 200만엔), 기금 수령자에게 보내는 일본 총리의 사과 편지, 정부 자금에 의한 의료복지 지원사업비 등이었다. 위로금을 국고가 아닌 민간모금에 의해서 마련하 는 것은, 국민기금이 법적책임에 의한 국가배상이 아니라 인도적 차원의 지원금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다. 2000년 당시 국민기금 부이사장을 맡고 있던 이시하라 노부오는 “이는 배상의 의미가 아니다” 라며 “공적개발원조(ODA)와 마찬가지로 인도적 견지에서 일정의 지원협력이라는 점이다. 배상이 아니다. 그러한 점에서 정부가 대응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자화자찬했다.

총리의 사과 편지 역시 기금 수령을 조건으로 하여 20만 명에 달하는 희생자는 물론이고 생존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선별적으로만 전달됐다. 일본측이 “법적책임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두 끝났다”면서 국민기금으로 도의적 책임까지 종결짓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가운데, 위안부 생존 피해자들과 정대협을 비롯한 각국의 지원단체들은 국제 사회에서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절차를 진행했다.

국민기금출범(1995년 7월19일)한달 뒤 유엔인권위 차별방지·소수자보호소위원회는 일본정부에 대해 ‘행정심사기구’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고, 1996년 3월엔 국제노동기구(IL0) 조약권고적용 전문위원회가 ‘일본군 위안부 강제노동 임금채권 등 해결 촉구 의견서’를 채택했다. 1996년 4월 유엔인권위는 일본의 성노예 문제에 대한 사죄와 국가배상을 권고한 특별보고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의 보고서를 채택했다. 1996년 8월 유엔 인권소위는 행정재판소와 중재 재판소를 통한 해결을 권고했고, 1998년엔 인권소위 특별보고관인 게이 맥두걸의 ‘전시 조직적 강간, 성 노예, 노예적 취급 관행에 관한 특별보고서’가 채택 됐다. 1999년 6월엔 국제노동기구(IL0) 총회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상정됐다. 이렇게 국제 여론이 일본에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일본 내에서도 학계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가배상을 실시해야 한다는 요구가 이어졌고,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총리는 “국제법적으로 이미 해결됐다” 며 국민기금을 통한 해결만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중개인 두고 피해자 협박, 지원단체와 떼놓기 위해 거짓회유

정대협이 국민기금에 반대한 것은 “국민기금은 범죄의 인정을 전제로 한 배상이 아니라 보상을 대신하는 조치‘이자 법적 책임을 회피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윤미향. 2013) 국민기금사업을 추진하면서도 일본은 지속적으로 위안부 연행의 강제성을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가 일본군이나 관헌이 아닌 민간업자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국민기금 수령자에 게만 전달되는 사과 편지에 서명한 하시모토 류타로, 오부치 게이조, 모리 요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등이 총리직을 거치는 동안 일본의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기술이 삭제됐다.(김부자. 2013)

국민기금은 피해자를 돈으로 회유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식의 비도덕적인 수단들을 동원했다. 국민기금은 기금 지급을 위탁해, 이를 대행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신원도 밝히지 않은 채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 “할머니는 어째서 기금을 받지 않는 거나?”라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국민기금과 피해자 사이에 개입해 기금을 받도록 알선하는 중개인을 뒀고, 이들 중개인은 그 대가로 1인당 200만원에서 1천만원까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국민기금은 피해자 할머니들을 정대협으로부터 떼놓기 위해 정대협이 할머니들을 제쳐놓고 돈을 받으려고 했다거나 “정대협 대표인 윤정옥이 일본 국민기금 사무실을 혼자 방문해 그 돈을 할머니들에게 주지 말고 직접 정대협에 달라고 요구했다”는 등의 거짓말까지 동원했다.(윤미향 2013)

국민기금의 이같은 행태는 피해자들과 지원단체들을 오히려 각성시키는 역할을 했다. 피해자를 회유하는 방식으로서의 국민기금은 실상 위안부 문제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일본의 또다른 얼굴이었던 것이다. 1996년 필리핀에서 개최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아시아연대회의에 참석한 피해자 고 정서운 할머니는 “단지 돈을 받기 위해 이렇게 괴로운 과거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떨리고 꿈속까지 나타나는 악몽같은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죄에 대한 정당하고 합법적인 배상을 받고 싶다”고 밝혔다. 김복동 할머니는 “자기들은 돈 던져주고 기분이 좋겠지만, (우리는)모욕을 당했다”고 했다. 1997년 도쿄에서 열린 국제긴급집회에서 김윤옥 정대협 공동대표는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를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면서 피해자들이 역사의 증언자, 운동의 주체로 스스로의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는 길은 법적조치와 사죄를 쟁취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밝혔다. 결국 일본이 위안부 문제의 법적책임을 부인하며 민간 모금을 통해 도의적 책임까지 종결지으려던 국민기금 시도는, 피해자 단체들의 반발 뿐 아니라 국제여론에서도 호응을 얻지 못하며 사실상 실패했다.

심판 없는 화해는 없다

▲ 화해치유재단 김태현 이사장. 사진=민중의소리.
▲ 화해치유재단 김태현 이사장. 사진=민중의소리.

2015년 12월28일 국민기금이 ‘부활’했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법적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가운데 10억엔을 거출해 한국정부로 하여금 ‘화해치유재단’을 설립하게 한 것이다. 12.28 위안부 합의에서 밝힌 일측의 입장은 고노 담화의 내용과 대동소이하다. 여기에 고노 담화 이후의 ‘국민기금’과 마찬가지로 국가배상이 아닌 인도적 차원의 위로금 지급도 동일하다. 일본은 10억 엔을 정부예산에서 거출해 “모든 전(前) 위안부 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취한다면서 한국 정부로 하여금 이를 집행하도록 했다. 화해치유재단이 피해자들에게 기금을 전달하기 위해 취했던 행태들 역시 국민기금과 매우 유사하다. 화해치유재단의 김태현 이사장 등은 “더 이상 끌어봤자 더이상 안 준다” “다른 할머니는 “먼저 죽은 그 친구들 못 받고 죽어서 참 안됐다”며 눈물을 흘리더라” “돈을 받고 사과 받았다고 생각하는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는 등 피해자들을 기망하며 기금 수령을 종용했다.

올해 100세를 맞은 김복득 할머니의 경우 화해치유재단 관계자 7~8명에게 둘러싸여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도 했다. 검은 양복을 입은 화해치유재단 관계자들은 김 할머니가 입원중인 병원으로 가족 몰래 찾아와 돈을 받으라고 종용했다.

화해치유재단의 이같은 피해자 회유 행태와 관련 해 송기호 변호사는 “국가의 기본권수호의무를 제 대로 하지 않고 공무원이 피해자의 약한 부분을 이용한 것”이라며 “넓게 보면 공무원법에서의 법질서 준수라든지 국민에 대한 봉사 의무, 품위유지 의무를 위반했다고 볼 수 있다. 없는 사실을 기망을 했다면 이는 상당부분 직권남용도 있는 것”이라고 지적 했다.

‘전쟁과 여성에 대한 폭력’ 일본네트워크(WAWWNETJapan) 공동대표 니시노 루미코는 “피해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상이란 정의롭지 못한 역사를 바로잡으려는 성격이 명확해야 한다”며 1988년 미국에서 제정된 시민적 자유법을 예로들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2년 3월~1944년 12월의 기간 전략 요충지였던 서해안의 일본계 주민 12만 명을 이주센터에 수용한데 대해, 전후 33년이 지난 1988년 시민적 자유법을 제정해 생존자 6만 명에게 법적 배상을 단행했다. 이는 일본계라는 이유로 강제수용된 피해자들의 ‘인간이 겪은 고통’에 대한 사죄와 보상이었다.(니시노 루미코. 2013. ‘피해자 부재의 화해론을 비판한다’)

국민기금이나 화해치유재단의 위로금이 피해자들을 위한 것이 아님은 그동안 국제사회에서 정립된 인권 침해에 대한 여러 기준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중대한 침해를 받은 피해자 의권리에 대한 기준을 정립한 반 보벤 보고서(1993)는 “피해 회복은 피해자의 필요와 요망에 부응해야 하며 원상회복과 배상, 갱생, 만족, 재발 방지의 보증” 이 필요하며 “국제법상 범죄에 해당하는 모든 인권 침해에 대한 피해회복의 내용에는 위반자를 소추하고 처벌하는 의무를 포함한다”고 했다. 명확한 법적 책임과 배상, 피해자 중심의 원상회복 노력이 없는 화해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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