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에 대한 김영삼 대통령 차남 현철씨의 거액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재판부가 돌연 심리 종결을 선언, 언론계 안팎으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겨레신문측은 재판부 기피신청을 내는 한편 기피신청서를 통해 재판부에 대한 외압의혹을 강력히 제기했다.
최고 권력자의 친족이 언론을 상대로 한 거액 손해배상 청구소송이라는 점에서 언론의 보도활동과 관련, 주요한 판결 사례로 기록될 이번 재판에 대해서는 언론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한겨레신문 이외에는 거의 보도되지 않는 이변을 낳고 있기도 하다. 한겨레신문측의 재판부 기피이유서 가운데 조기 심리 종결에 대한 부당성을 지적한 내용을 요약 소개한다.


“증인 이충범 다음 기일에도 안나오면 구인하겠습니다. 이충범 증인 집과 사무소에 법원에서 직접 다음 기일에도 안 나오면 구인한다고 전화하겠습니다.”(95년 12월 4일 정은환 재판장)
“구인을 한다고 해도 나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충범 증인처럼 자유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피해버리면 그만이니, 이 정도하고 끝내면 어떻겠습니까.”(95년 12월 18일 정은환 재판장)…중략…

언어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표현할 수 없는, 그 동안의 많은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피고는 이 재판을 원만하게 진행하기 위하여 노력해 왔다.…중략…사실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 사건은 현직 대통령의 아들이 온갖 비리의혹에 휩쓸리면서 국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나라전체에 소문이 나는데도, 언론기관들은 그에 대한 보도를 꺼리고, 그렇게 보도가 되지 못하는 저간의 사정에 대하여는 바로 언론인들에 의하여 다시 의혹의 소리가 높아 가는 현실속에서 피고가 이를 보도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국민에게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 언론의 감시를 받아야 한다는, 혹은 받을 수밖에 없다는 선례를 만들어 민주제도를 지키는 본보기를 세울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법률적으로 보더라도, 이 사건은 대통령의 아들인 원고가 ‘공인(公人)’인가, 공인이라면 그에 대한 보도를 하는데 언론기관의 주요의무는 어떻게 되는가, 입증은 어느 정도면 가능한가 따위의 제반 쟁점들에 대하여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김현철에 대한 본인신문을 채택하지 못하면서, 이충범에 대한 증인신청을 기각하면서, 이충범을 구인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마침내 재판을 막무가내로 끝내면서, 법률가로서 이유다운 이유 한마디 제시하지 못하고 ‘쩔쩔매던’ 재판장의 모습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하고 또 기록으로 남긴다.

이 사건은 민사사건으로 이렇게까지 서둘러 재판을 끝내야 할 어떠한 이유도 없는 사건이다. 더구나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의 경우, 아직 많은 쟁점들에 대한 변론과 증거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갑자기 한겨레신문의 증거제출과 변론을 봉쇄하고 재판을 끝내야할 이유는 원고 김현철의 정치적 필요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법원 스스로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하여 채택해 놓은 증거들을 조사하지도 않고, 그리고 그 채택을 취소한다는 결정도 하지 않은 채, 재판을 끝낼 경우 그것이 어느 쪽의 이익을 위한 것인가는 명백하다.

이충범 등 증인이 출석하여 한겨레신문 측의 신문을 통하여 그들이 한 진술의 모순이 드러나고 원고 김현철에게 불리한 사실이 폭로될 가능성을 막기 위하여 서둘러 재판을 끝낸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중략…

원고는 누구인가. 그는 현직 대통령의 차남으로서 그 지위를 이용하여 우리나라 정치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이다.…중략…

원고가 굳이 강조하듯이 “원고의 아버지인 현직 대통령”(소장 10쪽)의 영향력이 개입된 사건이 아니라면, 법원이 이처럼 필요한 증거채택을 꺼리고, 채택해 놓은 증거조사조차 포기하고, 피고가 신청한 증거에 대하여 채부결정도 하지 않은 채 재판을 서둘러 끝낼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묻는다. 재판부는 스스로 떳떳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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