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급지 신드롬인가. 요근래 각 신문사 경영진들의 단골메뉴는 신문의 ‘질’과 ‘수준’이다. 공·사석 가릴 것 없이 신문의 ‘품질’을 강조한다. 예전에도 이러한 주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의 강조점은 남다르다.

위기를 거론하고 책임을 내세우며, 그리고 내일을 얘기한다. 과거와는 달리 겉치레에 머물지 않고 진정성을 담은 듯이 보인다. 이들의 처방전은 표현은 다르지만 ‘고급지를 만들자’로 요약된다. 신문사 사장들 어록의 방점도 대부분 ‘고급지’로 모아진다. 우선 이들이 쏟아낸 어록들을 보자.

“지금까지 양적으로 1등이었다. 앞으로는 질적으로 확실한 1등이 되어야 한다. 솔직히 지금은 신문간에 질적인 차이가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조선일보 방상훈사장, 6월 13일자 사보 창간 60주년 기념 인터뷰)

“잘 팔리는 신문보다 질과 내용이 우리나라 최고의 신문이길 원한다. 우리신문의 기획과 취재가 다른 신문과 차별성이 없다.” (중앙일보 홍석현사장, 5월 6일 편집국 기자들과의 간담회)

“고급지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꿈이자 이상이다. 한국 제일의 수준높은 고급지 발행인이 되고 싶다.” (문화일보 남시욱 사장, 5월 25일,’문화일보 발전을 위한 워크숍’)

“정부와 공기업이 대주주로 있는 서울신문은 일반 사기업과는 달리 자본가로부터 자유로운 위치에 있다. 고급지로 발전할 수 있는 충분한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다.” (서울신문 손주환사장, 2월 26일 편집국 간부들과의 간담회)

비단 이들 신문사들만이 아니다. 한겨레 등 ‘개혁’을 화두로 변화를 모색하는 신문사들도 이러한 ‘고급지 논의’에서 예외가 아니다. 지난 5월말 회사 차원에서 ‘경영·편집 혁신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가동한 한겨레의 경우 특위에 참여한 기자들을 중심으로 고급지 논의가 한창이다.

아직은 수면아래에서 이러한 논의가 진행중이지만 임직원 대상의 세미나(6월 17~19일) 등을 통해 ‘고급지 논의’를 보다 가속화한다는 계획이다. 한겨레 편집국의 한 관계자는 “한겨레신문의 진로에 대해 ‘고급 진보지’를 겨냥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양론이 있으나 전체적인 방향은 고급지를 중심개념으로 설정하자는 의견이 우세하다”고 전했다.

겉으로 보면 한국신문업계를 휘감고 있는 ‘고급지 논의’는 화려하다. 최고 경영진들의 입을 통해서, 혹은 ‘생존전략’을 모색중인 실무자들의 구상 속에서 고급지 제작에 대한 강한 의욕의 징후들이 엿보인다.

그러나 속 내용은 아직도 ‘빈곤’하다. 말 잔치를 넘어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실천하는 신문사들은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문화일보 등 일부 신문만이 ‘고급지 논의’를 ‘토론의 장’으로 끌어내고 있을 뿐이다.

문화일보의 경우 사내 임직원들이 한데 모여 세미나 성격의 토론회(5월 25, 26일, 북악파크호텔)를 개최하는가하면 이를 주도적으로 추진할 특별기구를 발족했다. 노동조합 차원에서도 비상한 관심을 쏟고 심지어 경찰기자들은 ‘고급지에 걸맞는 사건기사’를 주제로 수련회를 다녀오기까지 했다.

사내에서 나도는 자료들도 다양하다. ‘고급지 제작 실태와 방향성 모색’(편집부장) ‘고급지 제작 전략 검토안’(노동조합) ‘고급지 제작 전략’(서강대 유재천 교수) ‘고급지와 편집국 보도체제 개선 방안’(성균관대 김정탁교수) 등등.

그러나 문화일보 역시 지면에서 감지되는 변화의 흔적들은 아직 미약하기 짝이 없다. 오피니언면을 강화한 것이나 1면에서 자극적인 컷이나 제목을 ‘절제’하는 것이 가시적인 성과로 여겨지고 있는 정도다. 오히려 사내 일각에선 하루하루 지면 메꾸기에 급급한 인력구조나 상명하달식의 고급지 논의에 불만을 표시하는 기자들도 적지 않다.

노조에선 개혁의 속도에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에 비해 경영진은 “고급지를 향한 준비가 너무 더디다”며 ‘논의’ 보단 ‘실천’이 중요하다는 반응들이다. ‘고급지’를 큰 방향으로 삼은 것엔 동의하지만 ‘윗 사람’들과 ‘아랫 사람’들이 체감하는 온도계가 사뭇 다름을 반증하는 정황증거들인 셈이다.

‘무한 경쟁’을 한국언론의 대표적인 분석틀로 꼽는 상황에서 일고 있는 고급지 논의는 역설적으로 한국언론의 수준을 반영하고 있다. 아직도 고급지가 없다는 것, 반면에 대중지,다시말해 신문의 원론적인 역할에 충실하기 보단 ‘팔리는 것’에 비중을 두는 신문제작 풍토가 뿌리깊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만큼 새로운 신문을 만들고 싶다는 일종의 집단적 갈증이 비등점에 이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고급지 논의는 각 신문사들의 구체적인 경영전략이기도 하다. 물량경쟁의 상대적인 피해자로 전락할 수 밖에 없는 후발 신문사들의 ‘탈출통로’이며 ‘차별화’를 꿈꾸는 신문경영자들의 ‘대안’인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고급지’를 말하는 각 신문이 삼는 모델들도 큰 차이가 없다. 미국, 영국등 이른바 언론선진국들의 대표적인 권위지들이 이들 신문사들이 추구하는 ‘이상향’들이다. 실제로 팀제나 섹션 개념을 맨 처음 도입한 조선일보, 중앙일보 등은 뉴욕타임스의 조직, 워싱턴 포스트의 지면 제작 기법을 다소간의 변형을 거쳐 자사 신문에 이식했다.

조선, 중앙을 비롯해 ‘고급지’를 표방하는 신문사들의 사장들이 빠짐없이 거론하는 것이 서구신문의 ‘발전사’이며 이들 신문의 ‘성장전략’이다.

과연 한국의 신문들은 서구 권위지들을 모방할 수 있을까. 모방의 단계를 넘어 우리식 ‘고급지’의 전형을 가꿔나갈 수 있을 것인가.

언론계 안팎의 시선은 아직까진 냉소적이다. 무엇보다 ‘총체적인 구조와 지형’이 이들 신문들과 너무나 다르다는 것이다. 자본의 성격이 다르며 사주들의 의식이 차이가 있고 특히 신문을 만드는 사람들의 자질이 천양지차라는 것이다.

여기에 언론사 내부의 전근대적인 조직구조, 독자들의 성향, 정치적 환경 등 낙관 보단 비관에 무게를 둘 수 밖에 없는 ‘조건’에 한국신문이 포위돼 있다는 진단이다. 이론적인 차원에서 문제점을 제기하고 방안은 내놓을 수 있지만 이것이 ‘현실화’되기 위해선 수 많은 ‘벽’을 깨야한다는 지적이다.

이화여대 이재경교수(신문방송학)는 고급지 논의의 실마리와 해결점을 기자 교육을 꼽았다. 한 마디로 지금과 같은 의식으로는 한 발짝도 진전된 형태의 신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제 아무리 거창한 개혁안들이 나와도 과거의 구습과 신문제작 관행에 젖어온 현재의 언론 구성원들이 이를 일상적인 규범으로 체화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그나마 유일한 대안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교육’뿐이다”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30여년간의 기자 생활을 거쳐 현재 중앙일보 전문위원으로 근무중인 안재훈씨는 한국신문의 무절제한 욕심이 제어되어야만 고급지 제작이 가능하다는 논리다. 그는 “한국신문은 대중지와 고급지를 동시에 추구한다.

그래서인지 아이템이나 취재영역이 너무 광범위하다. 다른 신문을 의식하기보단 철저하게 독자를 중시하고 백화점식 지면제작을 벗어나 자신 없는 취재영역은 과감하게 포기하면서 전문성을 추구해야만 말 그대로 고급지 전략도 그 힘을 얻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고급지 논의는 어찌됐던 생산적이고 긍정적이다. 고급지의 특성인 선정주의 배격,심층적이고 객관적인 보도 논지, 독립적인 지면제작 등 한국언론의 고질적인 문제점들이 고스란히 ‘해소’된 것이 바로 고급지의 특징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포장지는 외국산이지만 속 내용물은 저질 국산품인 ‘불량품’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것은 ‘순국산품’보다 품질이 형편없이 떨어지는 빗나간 사대주의에 불과하다는 점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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