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가 죽은 자에 대해 말하고, 죽은 자가 산자를 지배하는 것은 한국문화에서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죽은 자에 대한 예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전승되고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권택감독의 <축제>는 한편으로는 우리를 지배하는 죽은 자에 대한 사유를 담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죽은 자로부터 산자인 우리를 돌아보게 만드는 일상생활 속의 ‘우리 집단’의 구조를 담고 있다. 이것은 장례식 그 자체를 다루고 있지만, 여기서는 죽음에 대한 슬픈 상념에 빠져들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여기 그려진 것은 죽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경계로 죽은 자와 산자 사이를 서로 오가며 다시 물어보는 우리 삶 속에 담겨진 매우 은유적인 절차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이다.

소설가 준섭(안성기)은 아침에 고향에 있는 어머니(한은진)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는다. 오랜동안 치매로 고생하던 어머니의 유고이다. 사방에 흩어져 살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장례식을 치른다. 여기 집안의 천덕꾸러기이자 오랜동안 이들을 떠나 있었던 용순이(오정해)도 돌아온다.

임권택감독은 여기서 장례식을 쫓아가면서 또 한편으로는 준섭이 쓴 동화책을 슬며시 얹어 넣는다. 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은지는 한 집에서 산다. 은지가 궁금한 것은 할머니가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몸이 작아진다는 사실이다. 아버지는 그건 할머니가 은지에게 나이와 함께 지혜를 나누어 주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준다. 은지에게 모든 지혜를 나누어 주신 할머니는 돌아가신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가 이청준의 동화이다. 그러니까 영화 <축제>는 작가 이청준의 동화에 대한 일종의 독후감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축제>를 보면서 작가 이청준은 소설 <축제>를 써나간다.

그래서, 소설과 영화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 겹치고 주고 받는 대화와도 같은 것이 되어간다. 이것은 우리 문학과 영화의 두 거장이 마치 협연이라도 하듯이 빚어내는 포근하고 따사로우면서도 결코 그 어느 한순간도 깊이를 놓치지 않는 이중주처럼 펼쳐진다.

영화는 그 중심에 장례식이 있지만 또한 그것을 감싸안는 동화를 거치고 통과하면서 점점 더 서로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가 되어간다. 얼핏 그것은 여전히 세상만사의 눈에 보이는 것에 서로 잡혀 살고 있는 우리에게 맞서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장례식의 온갖 복잡한 소란스러움과 복잡하고 귀찮은 절차들이 등장인물들을 괴롭히는 것을 본다.

거기에는 쌓인 미움도 있고, 가족들 사이에 뒤엉킨 소원한 과거지사들이 섞여들고, 또는 장례식이라는 절차를 취하면서 그저 형식적으로만 치루는 효도를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밤이 깊어가고 장례식이 시작되면서 점점 더 사람들 사이를 하나로 묶어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때 동화의 이야기가 어린 은지의 나레이션과 함께 시작한다.

이것은 준섭이 쓴 동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들려주는 삶의 지혜이기도 하다. 죽은 자는 장례식을 통하여 산 자들을 하나로 묶어내고, 그 죽은 자를 기리면서 산자들은 다시 서로 하나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제는 가족이며, 그 결론은 화해이다. 임권택감독은 놀랍게도 그 자신을 사로 잡아온 한이라는 주제를 넘어서면서(<서편제>와 <축제>를 한번 비교해보라), 그것을 온통 형식에 가득찬 복잡한 장례절차를 통해 자신의 형식을 거꾸로 허물고 새로운 영화의 질서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는 나이가 빚어내는 삶의 성찰을 알고 있으며, 그 너비와 폭을 더해가며 여기서 이제 우리네의 흐트러진 지금 여기의 모습 속에도 여전히 남아있는 유산을 거슬러 올라가 결국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하는 가를 넌지시 이끌어 내고 있다. 우리의 장례식이란 얼마나 즐겁고 깊은 지혜가 담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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