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출범 직후의 신문사 창·복간 붐은 기자 스카우트 바람을 몰고 왔다.지난 88년 8월말 당시 문공부(현 공보처)에는 전국적으로 23개 신문사들이 신규 등록을 마쳤고 6개 신문사가 추가로 등록을 준비중이었다.

이같은 매체 ‘급증’ 현상은 기자들에 대한 수요 증대로 이어져 당시 문공부는 창·복간하는 신문사들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해선 1천8백여명의 기자들이 필요하다고 추산했다.

필요 인력의 일부를 수습 기자 채용을 통해 충당한다 해도 이들 창·복간하는 신문사들로선 당장 현장에 배치돼 취재에 임하거나 신문편집을 담당할 경력기자들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결국 새로운 신문사들은 경력기자를 공개채용하는 한편 기존 신문사의 경력 기자들을 상대로 한 스카우트 경쟁을 벌였다.

지난 88년 6월 당시 새롭게 창간했거나 창간을 준비중이던 중앙 신문사들의 스카우트 상황을 보면 한겨레 신문(5월15일 창간)이 편집국 인력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48명의 기자들을 스카우트했다.

한겨레 신문의 경우 초봉 33만원, 1년 경력에 2만여원을 추가 지급한다는 조건이었음에도 당시 언론계 ‘최고 대우’로 알려진 조선일보 출신이 11명으로 가장 많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민일보(12월10일 창간) 역시 창간을 앞둔 상황에서 경력기자 42명을 채용했는데 이들 중 25명이 기존 신문사에서 스카우트해 온 사람들이었다. 세계일보(89년 2월1일 창간)는 다소 느긋한 상황에서 4명의 간부급 인사들을 스카우트했다.

국민일보와 세계일보의 기자 스카우트는 7월에 접어들면서 본격화 돼 8월말께 들어서는 공채 등의 형식을 병행해 각각 70여명에 이르는 경력기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같은 기자 ‘모셔오기’가 과열 양상을 보이면서 때로는 스카우트 경쟁을 둘러싼 잡음이 뒤따르기도 했다. 신문사간의 신경전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어느 신문사는 부장들이 직접 기자들을 상대로 면담을 하는 등 ‘집안 단속’에 부산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편에선 몇몇 스카우트된 기자들이 “약속된 조건이 다르다”고 원래 회사로 되돌아가거나 다른 신문사로 발길을 옮기는 등 잡음이 일기도 했다.

소문도 무성했다. “어느 신문사는 간부들에게 해외 연수, 승용차 지급을 약속했다더라”거나 “기존 신문사 최고 대우보다 급료를 1.5배로 올려준다더라” 등 기자들을 ‘유혹’하는 갖가지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러나 지방지는 상황이 달랐다. 창간을 눈앞에 두고도 경력 기자들이 확보되지 않아 수습기자를 대거 채용해야 하는 신문사들이 많았다. 88년 8월 당시 영남일보는 인력 충원이 어려워 수습기자를 59명이나 뽑아야 했다.

88년 당시 기자들은 상한가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뺏기지 않기’ 위해서나 ‘모셔오기’ 위해 신문사들은 보다 나은 조건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는 기자들의 급여나 처우가 향상됐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기자 스카우트 경쟁은 신문사 편집국 인력 구조의 기형화를 초래했다는 부산물을 남기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어느 지방 일간지의 경우 ‘모셔오기’에 급급하다가 전과 13범 경력의 사이비 기자를 채용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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