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공화국 언론정책의 특징은 국가가 독점자본및 언론자본과 더불어 광범위한 지배계급연합을 형성함으로써 민중에게는 형식상으로는 간접적이고 다소 유화적으로 보이는 개방정책의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신문과 관련해서는 과거 권력 집단의 언론정책이 직접적·강제적 방식이었던 데 비해, 6공의 언론정책은 신문에 상대적 자율성을 부과하고 나아가 재벌의 신문소유를 대폭 허용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신문 영역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신문의 창·복간 붐과 재벌의 언론진출이라고 할 수 있다.

6공에서는 매체의 양적 팽창이 두드러진다. 정기간행물의 경우 신규 허가규제 조치의 완화로 폭발적인 증대를 보이며, 방송도 평화방송, 불교방송, 교통방송, 서울방송의 설립 및 교육방송의 독립 등으로 대폭 증대된다.

6공이 출범하기 직전인 1987년 12월 31일 당시와 6공 중반기인 1990년 12월 31일 당시를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일간신문은 30개에서 85개로 2.8배 이상으로 늘어나고, 주간은 2백26개에서 1천28개로, 월간은 1천2백98개에서 2천4백60개로 기타간은 8백65개에서 1천6백8개로 늘어난다. 그리하여 정기간행물 전체의 수는 2천4백12개에서 5천1백83개로 늘어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일간 신문의 수가 대폭 증대되었다는 점이다. 5공 시절 내내 창간이 허용된 신문은 서울신문의 <스포츠서울>밖에 없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가히 획기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국가가 독점자본과 지방 중소자본의 신문소유를 대폭 허용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을 두고 국가의 언론통제정책이 근본적으로 변화한 것이라고 판단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현상적으로는 국가에 의한 신문의 통제에서 자본에 의한 통제로 이행하는 조짐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미 신문이 ‘제도언론’으로서의 성격을 공고화한 데서 오는 일종의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의 신문통제는 ‘상대적 자율성’ 부여를 통한 간접적 통제로 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와 독점자본 사이의 끈끈한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신문에 대한 국가 통제의 큰 틀이 변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문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 부여는 방송에 대한 통제의 강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날로 증대되어 가는 방송의 대(對) 국민 영향력, 정보창구로서의 방송의 역할 증대 등에 착안한 국가가 그 통제의 과녁을 방송 쪽으로 집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재벌의 신문소유와 함께 종교자본의 신문소유 또한 두드러진다. 종교자본 역시 고유의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크게 보아서는 국가와 그 이념적 기반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재벌과 종교자본의 신문소유를 허용한 것은 겉으로는 언론자유를 부여한 듯한 인상을 주면서 극히 위험성이 적은 투기를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신문을 둘러싸고 국가와 독점재벌 및 종교재벌 사이의 지배계급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공 언론상황의 가장 큰 특색은 독점자본의 언론소유의 급증이다. 6공하에서 재벌그룹이 인수한 기존신문사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화약그룹이 경향신문을 인수하고, 롯데그룹이 국제신문을 인수하였으며, 대우가 항도일보(부산매일신문으로 개제)를 인수하고 대농그룹이 내외경제신문과 코리아헤럴드를 인수하였으며, 갑을그룹이 영남신문을 인수하였다. 또한 현대그룹이 문화일보를 창간하였다.

재벌그룹의 언론소유가 빚어내는 결과는 이미 1960년대에 중앙일보와 동양방송이 ‘한비 사카린 밀수사건’과 ‘미원-미풍 조미료 광고방송사건’에서 보인 행태에서 잘 드러난 바 있다. 재벌이 소유하는 언론은 재벌의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게 된 것이다. 예컨대, 항도일보는 ‘거제통신’이라는 고정란을 두어 대우조선과 관련된 기사를 상세히 보도하는가 하면, 국제신문은 90년 5월 1일자 18면 전면을 할애하여 ‘살아숨쉬는 역사를 배운다’라는 제목 아래 서울 롯데월드를 소개하는 기획기사를 실은 바 있다. 그리하여 언론이 독점자본의 홍보지로 전락하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한편, 6공 초기에는 창복간 언론의 홍수로 기존 언론사의 독과점구조가 일시 동요를 보이기도 하지만 곧 과점체제의 기반을 회복한다. 즉, 매체수의 증대는 매체 간의 경쟁을 더욱 가속화시켰지만, 기존의 신문대기업에 의한 독과점구조는 크게 변화되지 않은 채 온존되었다. 제5공화국에 들어서 본격화된 언론기업의 매출액성장은 6공 시기에 들어서면 더욱 가속화된다. 그리하여 4대 신문기업의 1990년의 매출액은 1980년의 6.1배로 성장한다.

한편 6공에서는 카르텔이 해체되고 증면경쟁 등을 중심으로 언론사 간의 경쟁이 치열해진다. 그러나 이 경쟁은 편집이나 지향의 경쟁이 아니라 증면이나 광고유치 등에서의 경쟁으로서, 언론자본의 이윤동기가 더욱 활성화된 것을 의미할 뿐 경쟁으로 인한 언론 간의 차별화와는 무관한 것이다.

또한 6공에서는 언론이 개별적인 권력분파로부터는 일정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일한 권력의 핵을 중심으로 하던 권력구조가 권력분파들 간의 연합이라는 구조로 바뀐 것의 반영일 뿐, 언론이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획득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정치상황의 반영으로 언론은 무정견(無定見)의 기회주의로써 자신의 이윤동기를 충족시키게 된다. 이러한 정치권력의 구조변화와 정치권력형성과정에서의 언론의 비중 증대에 힘입어 6공에서는 언론자본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증대된다.

결과적으로 6공의 언론정책으로 말미암아, 신문의 수가 대폭 증대하고 재벌의 언론소유가 급증하지만, 기존 신문의 독과점 구조는 온존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재벌의 언론소유, 그리고 매체수의 증가로 인한 광고주의 영향력 증대 등으로 독점자본이 언론에 대해 갖는 영향력이 대폭 커진 것도 사실이다. 물론 그 이면에서는 방송에 대한 국가의 통제 강화가 진행되었다.

재벌의 언론소유 급증과 광고주의 영향력 증대는 당장 6공에서는 그 효력을 크게 나타내지는 못했지만 재벌에 의한 언론의 사사화(私事化)의 본격적인 첫걸음은 이미 이 때 내디뎌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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