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세밑을 앞두고 언론의 대선 논의가 뜨거워지고 있다. 대선을 치르는 내년은 그야말로 한햇동안 ‘정치의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기국회가 마무리돼 가는 시점에서 늘 쟁점과 화제를 찾아 헤매는 언론으로선 대선예비주자를 가만히 둘 리 없다.

그들을 어떻게 해서든 불러내 그들의 내밀한 가슴 속에 숨겨진 ‘속셈’을 들춰내야 하는 것이다. 현재 대선예비주자 인터뷰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는 곳은 국민, 동아, 조선, 한겨레, 시사저널 등. ‘태동하는 대권산실’ ‘정치지도자 송년인터뷰’ ‘대선주자 인물탐구’ 등 다양한 표제를 달고 있지만 이들 언론이 알아내고 싶은 것은 오직 한가지다. 과연 출마할 것인가, 어떻게 경쟁자를 물리치고 후보를 따낼 것인가, 대선플랜은 무엇인가.

인터뷰가 아니더라도 연일 정치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대선예비주자들의 일거수 일투족과 이에 대한 경쟁자들의 반응이다. 아직 대선예비주자 인터뷰 시리즈를 시작하지 않은 언론사도 조만간 이를 진행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각 언론사는 97년 1월1일자 신년호에서 대선 예비주자에 대한 각종 여론조사, 가상시나리오 등을 특집으로 꾸밀 예정이다. 세밑에 이어 내년부터는 대선논의가 봇물처럼 터질 것임을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언론은 대선논의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실상은 외화내빈에 불과하다는 게 관계자들의 고백이다. 특히 신한국당 소속 예비주자들의 경우가 그렇다. 언론이 이들의 꼭다문 입은 어느 정도 열게했지만 알맹이는 뽑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터뷰에 응했다는 사실 자체가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대선 출마 여부에 대해선 한결같이 함구로 일관하고 있다. 어떻게 경쟁자를 물리치고 후보자리를 쟁취할 것인지, 어떤 대선플랜을 가졌는지에 대해선 즉답을 회피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인터뷰에서 나오는 대답은 문제의 핵심을 빙빙 돌고 이미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다른 인터뷰에서 중언부언하는 현상이 빚어진다.


예비주자들 대선 출마여부엔 함구

이렇게 된 데는 물론 김영삼 대통령의 ‘금언령’이 결정적 원인이다. 청와대는 누차 대선논의 과열 조짐에 대해 대선예비주자들과 언론에 경고표시를 해왔다. 지난 10월 중순 김대통령은 중앙, 동아, 조선, 한국일보 4개사 발행인들을 차례로 만난 자리에서 대선논의가 조기에 과열되는 것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앞서 주간조선의 대선예비주자 인터뷰가 한창 진행중이던 9월 중순 김대통령은 “독불장군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경고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김덕룡 정무장관 출연이 무산된 것도 특정 대선주자가 조기에 언론에 부각되는 것을 막기 위한 청와대의 조치 때문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비해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인 김대중, 김종필 총재도 대선주자라는 타이틀을 단 언론과의 인터뷰엔 상당한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이들 역시 인터뷰에서 대선 출마에 대한 즉답은 피하고 있으며 ‘국민이 원하면’ ‘조건이 성숙하면’이라는 단서를 달고서야 대선출마 의지의 한자락을 내보일 뿐이다.

‘DJP 연합’이란 변수를 두고 섣부른 의사표시로 상대를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계산이다. 또 누가 신한국당의 최종주자가 될지 안개 속에 가려진 상태에서 9룡, 7룡으로 불리는 고만고만한 신한국당의 주자들과 비교된다는 사실도 이들에겐 별로 유쾌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김종필총재의 경우엔 내각제를 주장하는 마당에 대선주자 인터뷰에 응하는 것은 스스로 논리를 이반하는 결과가 된다는 판단에서 상당히 자제를 하고 있다고 한다.

대선정국에 돌발적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한 언론은 이런 한계로부터 한동안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런 한계와는 별도로 현재의 대선예비주자 인터뷰가 후보자 검증이란 역할에 충실하지 못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우선 누가 대선 후보가 될 것인가, 김심은 무엇인가에 대해선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후보로서 갖춰야 할 조건과 자질, 경력에 대해선 추적 취재를 하지 않고 있다. 또한 후보에 대한 정보를 가감없이 제공함으로써 국민들 사이에 어떤 인물이 돼야 한다는 여론형성 기능을 수행해야 함에도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신문 보도는 홍수, 방송은 조용

이런 점에서 한겨레의 ‘대선주자 인물탐구’ 시리즈는 새로운 시도로 주목받고 있다. 종래의 인터뷰가 후보자의 ‘말 전달하기’ 수준을 크게 못벗어난 데 반해 한겨레는 후보자의 약점을 파고 드는 ‘부정적’ 접근 방식을 통해 각 주자의 자질과 경력을 따지고 있다. 이 기획이 나가자 각 주자들은 상당히 예민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김대중 총재는 한겨레에 대변인과 비서실장을 보내 “일방적으로 한쪽 면만을 보도했다”며 유감의 뜻을 표했고 신한국당 박찬종고문도 공보비서를 통해 “왜 하필이면 ‘꾼’이라고 표현하느냐”며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기획에 참여하고 있는 한겨레 성한용기자(신한국당 출입)는 “아직 성급하다는 소리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대선예비주자로 물망에 오르고 있는 인물에 대해선 철저한 추적검증과 사실확인 작업이 필요하다”며 “언론이 하지 않으면 어느 곳에서도 할 수 없다”고 기획취지를 설명했다. 후보가 결정된 뒤엔 곧바로 선거전에 돌입하기 때문에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속에선 후보검증이 자칫 어느 한쪽 편들기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한편, 방송은 신문의 과열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선논의의 ‘빙하지대’로 남아 있다. MBC가 창사기념 주간을 맞아 대선주자 시리즈를 기획한 것이 대선논의에 직접적으로 접근한 유일한 사례다. 이는 청와대가 그 어느 매체보다도 방송에 대해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라는 게 방송기자들의 공통된 분석이다.

대선예비주자들의 ‘몸사리기’도 큰 장애요인이다. 신문이나 잡지 인터뷰에선 별 어려움없이 털어놓던 말도 방송사 마이크만 들여대면 “마이크 빼고 얘기하자”고 주문한다는 것이다. 신한국당을 출입하는 한 방송기자는 “청와대나 대선예비주자나 가공할 영향력과 파급력을 가진 방송 앞에선 좀체로 투명할 수 없는 게 우리 정치현실”이라고 꼬집었다.

일선 기자들은 내년 벽두부터는 대선과 관련한 논의들이 홍수처럼 쏟아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대선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청와대도 각 주자의 입을 지금처럼 잠궈놓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주간조선 이상철부장은 내년에 벌어질 상황을 “그동안 너무 막아놔서 폭발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예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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