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언론사의 보도내용이 못마땅하다고 할지라도, 대통령이 직접 전화통을 들고 언론사 사장을 질타하는 나라는 대한민국 말고는 다시 없을 터이다. 역시 우리는 ‘희한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실감을 뿌리칠 길이 없다.

그 ‘희한한 나라’의 ‘희한함’은 어디에 뿌리하는 것인가. 책 한권을 쓰고도 남을만한 거창한 물음이지만, 잔 가지들을 쳐버리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별의 문제로 간추려질만 하다. 아무리 대통령이라고 할지라도 ‘할 일’과 ‘못할 일’,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할 일’의 분별은 있게 마련이다.

더러는 ‘통치’라는 말이 아직도 애용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대통령의 분별을 흐리게 하는 독소가 아닌가 싶다. ‘통치’를 강조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권력의 무소불위를 용납하게 된다. 분별의 절도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그 종말은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의 경계를 흐리게 하고, 마침내는
이땅의 모든 것을 거의 ‘사물시’하는 도착으로 떨어지게도 된다.

‘희한한 나라’의 ‘희한함’은 그쯤에서 끝나지 않는다. 5대 재벌이라던가. 10대 재벌이라던가 하는 기조실장들은 심지어 “노사의 형평을 추구하는 노동법은 안된다”는 망언마저 서슴치 않는다. 아무리 저들의 속셈이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공공연히 내뱉는 방자함 역시 분별없음의 소산이다.

‘희한한 나라’의 ‘희한함’은 끝없이 이어진다. 이제는 공영방송이라는 KBS의 간부들이 그 바톤을 이어받는다. 방송 단일노조를 이루어내고자 하는 KBS노조의 움직임에 대해서, 그들은 한결같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면서 벼라별 소리들을 늘어놓는다.

물론 언론학 교과서가 선언하듯이 사실은 신성하지만 의견은 자유이다. 벼라별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탓하자는게 아니다. 지난 11월30일치 가 전하는 이른바 ‘확대간부회의의 주요내용’은 다시 한번 ‘희한한 나라’의 희한한 풍경에 전율마저 느끼게 한다. 명색이 공영방송을 이끌어간다는 그들의 어록은 이렇게 기록된다.

“단일노조가 되면 KBS의 이익이 무엇이냐?” “잘 나가는 KBS가 하향평준화 해서는 안된다…무엇이 아쉬어서 단일노조로 가야 하는가?” 줄줄이 이어지는 어록들은 한마디로 ‘공영’의 발상과는 연이 멀다. 섬짓하게도 ‘사영’의 발상만이 춤을 추는 것으로 보인다.

‘공’이란 무엇인가. ‘사’가 아니라는 뜻이다. ‘나’에 갇혀서도 안되고 비좁은 ‘우리’에 파묻혀서도 안된다는 뜻이다. 열린 ‘너’와 ‘나’, 한없는 더불어 삶의 ‘우리’를 위해서만 ‘공영’은 허락된다. ‘공영’의 ‘공영’다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영방송을 이끌어간다는 자부에 넘치는 그들은 오로지 KBS의 공리에만 사로잡힌다. 열린 ‘우리’를 거부하고자 한다.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놀라운 일은 다시 놀라운 사태를 불러오게 된다. 이른바 상승의 악순환이다. 간부회의의 어록들은 이렇게 ‘발전’한다. “(노조)본연의 목표인 후생과 복지등 내부문제를 전진시켜야 한다. 잡다한 문제까지 처리하려면 소모적으로 흐른다.” “KBS발전 복지후생을 등한시하고 정치적으로 요구한다. KBS를 정치투쟁화 하겠다는 것이다.”

기업별노조가 갖는 힘의 한계와 산별노조의 세계성이라는 원론은 접어두기로 하자. 정작 그들은 방송단일노조의 동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는 것인가. 알면서도 모른척 하는 것인가. 방송의 독립과 민주언론이라는, 그야말로 ‘공영’다운 ‘공영’, 언론다운 언론을 이루어내기 위해서임을, 그들은 모른다는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 풍진세상을 잘도 헤엄쳐나가는 그들이, 그것을 모를 턱은 없다. 그들이 말하는 ‘정치투쟁’ 또는 ‘잡다한 일’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가. 그들은 오로지 방송의 독립, ‘공영’다운 ‘공영’, 그리고 민주언론다운 민주언론을 위한 추구를 ‘정치투쟁’이라거나 ‘잡다한 일’쯤으로 폄하하고 있을 뿐이다.

놀라움을 넘어 한탄이 저절로 터져나온다. 아, 이땅의 겨레는 ‘공’과 ‘사’를 분별하지 못하고, ‘공’의 뜻을 바로 새기지 못하는 무리를 ‘공직’에 앉혀오고 또한 ‘공영’의 소임을 맡겨 왔던가. 그러나 한탄은 한탄만으로 머물기를 스스로 거부한다. 한탄은 오히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전의를 촉발하게 마련이다.

그렇다. ‘공영’을 ‘공영’답게 가꾸고, 언론을 언론답게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결코 이대로는 안된다. ‘공영’과 언론의 주인이 바로 겨레임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그 깨우침은 겨레의 뜨거운 뜻과 행동을 기다려서만 기약된다.

언론을 언론답게 일으켜 세우는 작업은 결단코 ‘잡다한 일’일 수 없다. 여·야가 진흙탕싸움을 벌이는, 그따위 정치투쟁일 수도 없다. 공적인 현실을 사적인 이해와 결부시킬 수 밖에 없는 무리에게, 우리의 공적인 현실을 맡겨둘 수는 없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