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동계의 최대 관심사였던 제도 개선을 통한 노동자의 삶의 질 ‘회복’은 결국 기대로만 남게됐다. 지난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근 10년 동안 노동계의 최대 숙원이었던 노동법의 민주적 개정 요구는 ‘신노사관계 개혁’이란 구호로 포장된 경제 회생 논리에 밀려 또 다시 좌절의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당초 노동계는 이번 노동법 개정을 통해 지난 80년 신군부의 초헌법적 통치기구였던 국보위가 만들어 놓은 △복수노조 금지 △3자 개입금지 △노조 정치활동 금지 △교원공무원 노조 설립 금지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등 ‘악법’ 조항들의 철폐를 기대했다. 정부가 ‘개혁’ 차원에서 법 개정 작업에 착수한 이상 현행 노동법 가운데 과거 군사정권의 노동통제장치들은 당연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10일 확정된 정부의 노동법 개정안은 이같은 노동계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다. 민주노총 합법화 문제와 관련해 외견상 최대 쟁점으로 떠올랐던 복수노조 금지 규정은 단위 사업장의 경우 3년간 유보기간을 두었다. 그러나 정부 보수론자들은 최근 상급단체 역시 3년간 복수노조 허용을 유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3자 개입금지 조항의 경우 여전히 ‘노동부 장관에 신고된 사람이나 단체’라는 단서조항을 달고 있다.

노조의 단체행동권을 제약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아온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조항은 오히려 대상 사업장을 확대했다. 전교조의 합법화 역시 ‘제2교총’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으며 노조의 정치활동 금지 규정은 국민의 참정권 제약 시비를 일으키고 있는 현행 선거법의 제한 규정에 의해 ‘삭제’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반면 사용자측 요구인 △정리해고제 △변형시간근로제 △파업시 대체근로의 허용 △노조 전임자의 임금 지급 금지 등은 노동계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대로 수용됐다.

결국 이번 노동법 개정안은 현 정부 역시 경제 성장 논리를 내세워 노동자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과거 정권과 별다를 게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정부의 법 개정안이 확정되자 노동계가 일제히 반발해 총파업 투쟁을 선언하고 “정권타도 투쟁도 불사하겠다”고 밝힌 것은 이에 따른 것이다.

정부의 노동법 개정 작업이 이렇듯 파행적 귀결을 맞게 되리란 것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일이기도 하다. 지난 4월 정부가 노동법을 개정하겠다며 법 개정 시안 마련을 위해 구성된 노사관계개혁위원회(이하 노개위·위원장 현승종)에 노동계의 참여를 요청했을 때 노동계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

김영삼 정부가 주도한 이전의 개혁 작업들이 용두사미로 끝난 전례가 많았음을 볼 때 노동법 개정 역시 겉치레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였다. 또한 노동법을 둘러싼 노사간 갈등이 증폭될 경우 정부가 일방적으로 법 개정안을 확정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반면 노동법의 이해당사자인 노동계가 노개위에 불참한 채 정부와 재계 주도로 이뤄지는 법 개정 작업을 지켜볼 수만도 없는 노릇이었다. 정부가 ILO 이사국 진출, OECD 가입 등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거질 국제적 압력이 어느 정도 노동계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란 기대 섞인 전망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노개위는 출발부터 노동계에 불길한 앞날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체 30명의 위원중 노사대표 5명씩을 제외한 공익위원들의 상당수가 친정부적 성향의 인물들로 채워진 것이다. 이는 노개위 논의가 정부 의도대로 흐를 것이란 우려를 낳았다.

이는 법개정 요강소위원회의 공익위원들이 지난 9월 ‘공익위원안’이란 것을 내놓으면서 현실화됐다. 변형 시간근로제와 정리해고제의 전면 도입,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 금지 등 ‘국가 경쟁력 제고’를 내세워 재계의 요구를 대폭 수용한 것이다.

5개월여 동안의 노개위 논의 결과가 이렇듯 재계쪽에 유리하게 나오자 지난 10월2일 민주노총은 노개위 불참을 공식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정부 스스로 내걸었던 합리적 노사관계의 정착을 위한 고심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게 민주노총의 결론이었다.

지난 18일 정기국회가 끝나고 노동법의 회기내 처리라는 정부 방침이 무산됨에 따라 일단 노동계의 총파업 투쟁이 유보되긴 했으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정부여당이 23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를 통해 노동법 개정안 강행 통과를 계획하고 있어 연말연시 노동계와 정부의 충돌은 불가피할 전망이다. 정부 당국은 연말연시라는 시기적 특성상 노동계의 총파업 여진이 크게 확산되지는 못할 것이라고 계산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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