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말’을 먹고 산다. 그런 탓인지 언론계는 유난히 말이 많고 빨리 퍼진다. 96년 언론계를 떠돌았던 말들을 모아본다. 이 말들 속엔 96년 언론계가 겪은 희망과 좌절, 웃음과 눈물이 교차하고 있다.

필요하면 당신이 와서 가져가시오

▶검찰에 오면 다 여기에 서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줄 알았다.
(12·12, 5·18 사건 수사 당시 관련자들이 검찰에 소환될 때마다 포토라인에 서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이 사건과 전혀 상관없는 한 사람이 포토라인에 서서 사진기자들에게)

▶바쁘거든요. 직접 와서 가져가시면 안되겠습니까.
(지자체 실시 이후 중앙일간지 수원주재의 한 기자가 군포시에 쓰레기 소각장 관련 자료를 전화로 부탁하자 한 공무원이 한 말. 달라진 언론환경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 국가의 최고 권부를 취재했던 자랑스런 경험이 도리어 매도되고 심지어 마치 권력자들과 은밀한 뒷거래를 벌인 언론인으로 치부하는 일각의 시각이 섭섭하다.
(전두환씨 비자금 언론계 유입설이 나돌았던 지난 2월 5공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한 기자의 푸념)

어디까지나 보도사례비…

▶사장인 나도 9시 뉴스에 무슨 아이템이 나가는지 뉴스를 보고 안다.
(새정치국민회의 공정보도대책위원회가 2월10일 방송 3사를 방문 불공정 방송에 대해 항의하자 MBC 강성구 사장이 내민 ‘오리발’)

▶노보에 대한 공정방송위원회를 소집하자.
(KBS노조가 2월26일자 노보를 통해 홍두표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자 회사측에서 나온 제안)

술 먹고 한 말 보도해서야

▶‘기획특집’이 아닌 ‘기획찬양’이었다.
(2월25일 김대통령 취임 3주년을 맞아 TV 3사가 기획특집을 내보낸 데 대해 방송노조의 한 관계자가)

▶촌지가 아니라 홍보비 명목의 보도사례비일 뿐.
(김두관 남해군수가 2월말경 4천만원에 이르는 촌지지급 사실을 공개하자 주재기자들의 변명)

▶여당 중진이 술마시고 한 터무니없는 말을 언론이 확인없이 보도해 큰 피해를 보았다.
(김원기 민주당 공동대표가 총선 직전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 나와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로 ‘2중대론’이 확산되고 있다며)

편파보도 때문에 낙선

▶무슨 구상이니 하면서 창밖으로 먼산 바라보며 고뇌하는 듯한 대통령의 모습…그게 무슨 정치다큐멘터리도 아니고 왜 뉴스에 그런 게 등장합니까.
(MBC 파업 당시 PC통신에 올라온 파업지지문 가운데)

▶기자협회는 안기부 편인가, 김정일 편일가, 진실 편인가, 기자 편인가.
(월간조선의 성혜림 탈북 사건 보도에 대해 기자협회보가 비판하자 기사를 쓴 우종창 기자가 월간조선 4월호를 통해)

▶상대 후보보다 언론이 더 힘들었다.
(4·11총선 당시 강남갑 선거구에서 낙선한 국민회의 강동연 후보가 자신의 패인은 언론의 편파보도 때문이라며)

▶정치가 3류면 언론은 4류다.
(권오기 통일원부총리가 5월4일 통일원 출입기자들에게 불만을 표시하며)

기사 삭제,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젊었을 땐 분개해서 항의를 했지만 지금은 체념한 상태다.
(세계일보가 5월15일자 삼성의료원 의료서비스가 부실하다는 기사를 삭제한 데 대해 이 기사를 쓴 과학부 주태형기자가)

▶언론을 포함한 기득권층은 많은 자금, 정보,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노회한 사람들로 이들의 저항이 얼마나 무서운지 실감했다.
(박관용 신한국당 의원이 6월29일 한국정치학회 세미나에서 YS집권 초기의 언론 사정이 무산된 데 대해)

언론때문에 자살하려 했다

▶방송개혁국민회의는 실체가 없는 단체다.
(이성언 공보처 신문방송국장이 7월2일 방개혁 주최의 세미나 초청에 불참한 이유를 설명하며)

▶내 딸은 언론 때문에 약을 먹고 자살하려고 했다. 휘발유를 갖고 언론사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다.
(성폭행을 당한 여중생이 학교에서 출산했다는 보도를 접한 여중생 아버지의 말)

윤전기라도 세워서 기사 막아야지

▶솔직히 지금 상황은 윤전기라도 세워야 할 입장이다.
(중앙일보 7월16일자에 건영그룹의 SBS주식 매각 관련 기사가 나가자 건영그룹 홍보실 관계자의 말)

▶피해 당사자는 우리인데 어떻게 동아일보보다 더 미온적으로 대처할 수 있느냐.
(남원당 지국 살인 사건 이후 동아일보가 피해 당사자인 조선일보보다 한술 더 떠 ‘재벌언론의 폐해’를 지적하자 방우영회장이 편집국 간부를 질책하며)

▶재벌언론이 존재의 문제라면 언론재벌은 행태가 문제다.
(신문전쟁 사태에 대해 한 재벌언론사 기자의 촌평)

▶일제 식민치하에서 내선일체를 주창하던 친일어용지를 금광거부 방응모 선생이 인수해 중흥시킨 것이 조선일보 아니던가.
(조선일보의 ‘중앙일보 죽이기’에 대해 중앙일보는 7월29일자 1면 칼럼을 통해 반격에 나섰다)

여기자는 외모로 취재해라?

▶외모도 변변치 않은 네가 무슨 기자냐. 못생겨도 기자가 될 수 있느냐.
(지난 8월 한총련 사건 당시 진압경찰이 취재중인 여기자들을 희롱하며)

6하원칙도 무시한 한총련 보도

▶이번 한총련 사태에 대한 언론보도는 ‘5W1H’ 가 아니라 ‘4W1H’였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는 있지만 학생들이 ‘왜’ 시위를 했는가 빠져 있다.
(한총련 사태 보도를 지켜본 한 언론학자의 말)

▶왜 이런 사진이 여기 걸려 있느냐.
(로이터통신의 앤드류 브라운 서울지국장과 프리랜서 사진기자 마이클 윌버씨가 지난 8월23일 술을 마신 뒤 외신기자클럽에 걸려 있던 김대통령의 사진을 창밖으로 던지며)

나는 토끼 이빨이 아닌데…

▶CBS가 도대체 어느 나라 방송이냐.
(김대통령이 8월23일 언론사 편집·보도국장을 초청한 공식 오찬자리에서 CBS 뉴스 보도논지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며)

▶이빨을 툭 튀어나오게 그리는데 실물은 그렇지 않잖아요. 그림을 사실대로 그려야지.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11월 1일 시사만화가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리는 검은 안경의 사나이가 아니오

▶안기부 요원을 그릴 때 검은 안경 좀 빼달라. 안기부 요원들은 대부분 신사고 매너도 좋다는 점을 참고해달라.
(안기부가 11월12일 시사만화가들을 초청, 대북정세 설명회를 가진 자리에서)

▶왜 빠졌는지 기억이 안난다.
(SBS 송석형 보도국장이 11월말 김현철씨의 신체장애 비하발언이 왜 뉴스에서 빠졌느냐는 물음에 대해)

▶위로는 눈치 정치, 아래로는 벙어리 정치였다.
(주간조선 이상철 부장이 여권의 대선주자에 대한 연쇄 인터뷰를 마친 뒤 소감을 묻자)

▶뭘 하겠나. 마음 같아선 산골에나 처박혀 살고 싶다.
(한국일보에서 명예퇴직을 당한 모 편집위원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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