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은 “모든 권력은 국민에서 나온다”고 규정하고 있다. 권력구조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현재 사실상의 대통령 선거전을 치르고 있는 여러 후보들은 “권력은 우리들이 손아귀에 쥐고 희롱하는 구슬에 불과하며 우리들간의 합의를 통해 권력구조 쯤은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 않고서야 최근 며칠 동안 거의 매일 같이 ‘내각제’ ‘이원집정제’ ‘책임 총리제’ 등 개헌을 해야 할 굵직한 이야기들이 그들의 입술을 그토록 가볍게 움직일 수는 없지 않았을까.

집권당의 정강에서 대통령 중심제를 뺄 수도 있다는 발상이 나온 것도 몇몇이 손잡으면 헌법쯤이야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실로 거만한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어떤 민주적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정당이 이 나라에 있다는 사실도 충격적이다.

정치권에서 나온 일련의 주장들은 국민들에게 과연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킬만한 큰 사건이다.

임의로 권력구조를 개편하기 위한 개헌은 우리 헌정사를 얼룩지게 만든 고질적인 처사였다. 세계사적인 망신인 사사오입 개헌, 정권연장을 위한 삼선개헌, 민주주의를 정면에서 부정한 유신개헌, 이탈리아 무솔리니 당시 헌법에 있었다는 ‘제1당이 전체 비례대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규정이 담긴 5공헌법은 모두 그 사례에 들어간다.

이런 숱한 개헌들은 권력자들을 위해 강압적으로, 단지 그들의 손쉬운 권력 향유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지금의 헌법은 ‘대통령 직선제’를 목이 쉬도록 외친 6월항쟁 끝에, 당시 모든 정당의 합의로 이뤄진 것이다. 그리고 그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는 단 두번에 불과했다. 당시 개헌을 합의한 이들 정당은 지금은 모두 사라졌으나 당시의 정당 대표들은 지금의 대통령이거나 대통령 후보 등 현역 정치인의 자리에 있다.

문제는 이런 전근대적인 발상이, 그리고 망발이 21세기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의 입에서 나왔는데도 언론이 중계방송만 하고 있다는데 있다. 언론은 국기를 뒤흔들 대사건에 대해 팔짱을 끼고 합종연횡의 한 구도로만 여기면서 강건너 불 보듯 하고 있는 것이다.

언론의 취재현장은 역사책 속이 아닌 바로 지금의 현실이다. 그리고 권력구조에 대한 내용은 권력을 잡고 싶어하는 사람이 편의에 따라 제멋대로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에도 독재자를 제외하고는 헌법을 바꾸자는 주장을 한번의 공청회도 없이 마구 내뱉는 사람은 없었다.

언론이 할 일은 이같은 어이없는 발상은 물론 그 의도와 예상되는 파장까지도 분명하게 보도하고 분석하며 비판하는 일이라고 본다.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란 것이 힘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농단당하고 있느냐를 분명히 알리는 일이야말로 국민이 알고자 하는 내용이며 이를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기도 하다.

만일 일련의 논의들이 타당성이 있다면 신문 속에 이에 대한 활발한 토론을 끌어 들여야 했다. 어떤 경우이든간에 일회성 중계방송으로 끝나서는 안될 일이었다. 21세기를 앞두고 준비해야할 국가의 비전을 하나도 마련하지 못한채 오직 얼굴에 분바르고 측근들이 가르쳐준 연기나 하면서 표를 모으는 것을 정치로 착각하는 사람들을 언론이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정작 신문에서 보다 심층적으로 다뤘어야할 생존의 문제들, 예를 들면 퇴직금 문제나 고용안정 문제 등은 소홀히 다루고 있다. 정치권이 표류하면 언론도 표류하는가. 언론이라도 제대로 서야 나라가 잘 돌아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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