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색 망령 부추기기

지역 정서와 관련된 방송 보도가 위험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단어의 선택이 극히 무절제한가 하면 지역 감정을 부추기는 멘트가 여과없이 전파를 타고 있다.

지역 할거주의의 청산은 한국 현대사의 최대 과제 중의 하나다. 특히 ‘97 대통령 선거에서는 영남 지역 출신을 표방하는 후보가 없다는 점에서 지역 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방송 보도는 여전히 구습의 굴레를 벗지 못한 채 지역 감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으며, 이를 비판하는 기사는 단 한 줄도 없다.

우선 ‘영남 지역’을 가리키는 단어부터 선정적이다. ‘무주공산’이나 ‘전통 여권 표밭’ 등의 표현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 9월 30일 KBS 9시 뉴스는 ‘지역 공약 공세’라는 제목의 리포트에서 “야권의 두 총재가 오늘도 현 정부의 기반인 영남지역에서 지지 세력 확대를 노렸다”고 보도했다.

MBC 뉴스데스크도 지난 9월 27일 리포트에서 “각 후보들이 영남 지역의 방황하는 표심을 잡기 위해 어느 지역보다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표현했다. 같은 날 SBS 8시 뉴스도 “전통적으로 여권 표밭이었던 이 지역 유권 성향이 영남권 출신 유력 후보가 없는 이번 대선전에서는 흩어지는 양상을 띠면서…”라고 보도했다.

지역색을 자극하는 멘트는 지난 10월 1일 SBS 8시뉴스에서 극에 달했다. SBS 앵커는 ‘영남 민심 집중 공략’이라는 리포트의 앵커멘트에서 “영남지역을 바깥 주인 없이 홀로된 과부집에 빗대서 대선 주자들 모두가 넘보는 상황을 풍자한 신문 만화를 재미있게 보았습니다”라고 말했다. 신문 만화도 문제지만, ‘그것이 재미있다’는 앵커멘트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이밖에도 방송 보도는 영남 지역에서의 후보 동정을 표현하면서 ‘대구에 상륙했다’, ‘경남 지역을 훑다’, ‘무주공산 공략’ 등 지역성과 연관돼 가히 전쟁을 방불케 하는 흥미 위주의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했다.

지역색 부각은 선거 양상을 재미있게 표현해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언론이 언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이렇게 지역주의의 틀 안에서 말장난만 할 것 인지 반성할 때가 됐다.

핵심 비켜간 ‘경제인 사면’

지난 9월 30일에 단행된 ‘경제인 사면’과 관련해 방송은 수박 겉핥기 식 보도로 문제의 핵심을 비켜갔다. 방송 3사는 약속이나 한 듯이 사면 대상 명단 및 사면 배경을 간단히 1꼭지로 처리했다. 그나마 이번 사면 조치가 ‘경제살리기의 일환’이라는 법무부의 발표가 유일한 사면 배경 설명이다.

대기업 회장들이 전두환, 노태우씨 비자금 사건과 연루돼 줄줄이 검찰청사로 소환됐을 때 방송 3사가 일제히 대낮 특별 생방송을 했던 상황을 기억하는 시청자라고 한다면 분명 배신감을 느꼈을 법하다.

주요 일간지들은 ‘대법원 판결후 5개월만의 사면’, ‘대선을 겨냥한 재벌과의 관계 개선을 노린 것’, ‘전,노 사면의 사전 포석’ 등의 비판적 견해를 실었지만, 방송은 언론으로서 직무유기를 한 셈이 됐다. 이런 얄팍한 보도가 시청자로 하여금 여전히 방송을 외면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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