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쁜 하룻밤이었다.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간의 박빙의 대결이 벌어진 18일 저녁, 각 언론사 편집, 보도국은 ‘긴박감’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4~5번의 판갈이를 단행해야하는 신문사의 경우 이러한 긴장도가 더했다.

특히 신문사들의 성향에 따라 김대중후보의 당선에 관한 판단의 차이가 컸다. 서울신문과 세계일보 등은 ‘당선 유력’ ‘당선 확실’ 등의 표현으로 끝까지 신중한 모습을 보인 반면 동아, 한겨레 등은 밤 11시경 김대중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을 엿보였다.

서울신문 등은 김 후보가 1% 우세를 계속 이어가고 지지자들이 일산 김후보 자택에 모여들어 축하 인사를 하고 있던 19일 새벽에 발행된 신문에서도 기사 말미에 ‘순위가 뒤바뀔 가능성도 있다’는 구절을 삽입해 비아냥을 샀다. 이날 각 신문사 편집기자들은 ‘대접전’ ‘확실’ ‘유력’ 등 제목 사용을 놓고 격론을 벌이는 모습이었다.

0---저녁 7시20분경 일제히 발행된 18일자 초판은 대부분의 조간신문들이 박빙의 싸움으로 보면서도 ‘이회창’ 후보의 당선에 무게를 실었다. 경향, 동아, 중앙, 한겨레 등 대부분의 신문들은 ‘이회창-김대중 대접전’으로 보도했다. 이같은 이름 순서는 저녁 9시경 발행된 지방판에서도 계속됐다. 두 후보간의 이름 순서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10시경부터. 동아일보가 10판부터 ‘김대중-이회창 각축’으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동아의 경우 편집국 간부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각 여론조사기관의 조사 결과와 MBC 등의 판세 예측을 토대로 ‘김대중 후보 당선’이 유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김 후보의 이름을 앞에 내세웠다.

조선일보의 경우 강원지역과 충청 일부 지역에 배달되는 20판을 발행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등 개표 결과 보도에 극도의 신중함을 유지했다. 이러한 기조는 다른 신문들도 비슷했다.

두 후보간의 각축전이 김대중 후보의 확실한 우세쪽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18일 저녁 11시경부터 각 신문들은 ‘김대중 당선 유력’으로 판갈이를 했다. 한겨레도 4판부터 ‘김대중 당선 유력’으로 나갔다. 그러나 미리 준비해두었던 당선 후보 라이프 스토리 등은 게재하지 않았다. 그만큼 위험부담이 컸던 것이다. 김대중 후보의 유력이 드러나면서 편집국 간부들의 얼굴 표정도 제 각각인 모습을 보였다.

한 신문사 편집국장의 경우 10판을 제작하고 국장실에서 아예 나오지 않은채 한동안 깊은 사색에 잠겨 기자들의 동정(?)을 자아내기도 했다.

김대중 후보의 당선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새벽 1시 반에 발간된 각 신문들의 최종 시내판. 각 신문들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통단으로 게재했다. 새벽 1시경 이회창 후보가 패배를 인정한데다 두 후보간의 격차가 1.5%를 넘어서면서 당락이 결정된 것으로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일부 신문들은 각 방송사에서 제공한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에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한국일보 이종구 정치부장은 “저녁 10시 30분경 지역별 투표율과 전체 개표율을 종합해 분석한 MBC의 ‘예측 프로그램’에서 김대중 후보가 30만에서 40만 정도 앞설 것으로 판단, 신문제작에 참고했다”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서울과 세계는 김대중 후보 당선에 끝까지 미련을 두는 모습을 보였다. 세계일보는 오전 2시 33분 서울시내 일부에만 뿌려지는 소위 ‘광화문 판’을 제외하고는 김 후보 당선을 인정하지 않았다. 세계는 ‘철야 개표 순조’(10판·오후 6시 강판), ‘이회창 김대중 숨막힌 접전’(30판·11시 30분 강판), ‘김대중 후보 박빙 리드’(40판, 오전 1시 15분 강판), ‘김대중 후보 당선 유력’(45판, 오전 2시 33분 강판) 등으로 내 보냈다.

서울신문도 우여 곡절을 거쳤다. 최근 전산 시스템을 교체하면서 신문제작 사고가 다반사로 발생하고 있는 서울의 경우 새벽 1시 30분경 제작되는 20판 제작 도중 또 다시 시스템 장애가 발생하면서 평소보다 40분 가량 강판이 늦어졌다. 20판 제목은 ‘김대중 후보 당선 유력’. 서울신문은 새벽 3시를 넘어서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제목으로 한 40판을 발간했다.

서울신문의 한 편집기자는 “정치적인 의도를 갖고 있었다기 보다는 지난 92년 14대 총선 당시 초판에서 여당의 압승을 점쳤다가 망신을 샀던 전례가 있는데다 전산시스템이 애를 먹여 결과적으로 신중한 모습으로 비쳐진 것 같다”고 분석했다.

한편 각 신문들은 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인생 역정은 물론 인맥, 해설기사를 별도로 사전 준비해 놓은 상태에서 판세에 따라 기사를 대체하기로 결정했으며 서울시내판에서 대부분 김 후보 특집, 기획 기사로 판갈이했다.

한국일보의 경우 사전에 광고국과의 협의를 거쳐 전면 광고를 들어내고 김 후보 기사로 대체했으며 동아는 ‘공약으로 살펴본 김대중 시대’ 등의 기획을 통해 정권 교체 이후의 한국 사회 변화를 발빠르게 예측하기도 했다.

대선 기간중 극심한 불공정 시비에 시달렸던 중앙일보도 김대중 후보의 선대위원장을 맡았던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의 칼럼을 게재해 눈길을 끌었다. 김 선대위원장의 칼럼은 김대중 당선을 예상한 야당 출입기자들이 선거 이틀전 미리 받았놓았던 것. 정치부 데스크들은 한때 칼럼 게재에 반대했으나 내용을 보고 ‘OK’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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