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참담하다. 돌이켜보기 바란다. 우리 언론은 선거 앞에서 얼마나 오만했는가. 집권세력에 노골적으로 편향된 언론보도가 새삼 참담하다는 뜻은 아니다. 언권(言權)선거라는 비판여론에 어떻게 답했는가. 여당후보의 선거전략대로 신문을 편집한 뒤 이에 항의하자 오히려 날을 세웠다. 사실보도인데 웬 시비냐는 으름장이 그것이다. 신문묶음이 불살라지자 ‘언론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외마디를 질러댔다.

더욱 참담한 것은 선거 뒤에 벌어진 사태다. 수십년 ‘반DJ’로 일관해온 지면과 화면에 느닷없는 ‘인동초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다. ‘겨울에 활짝 핀 인동초’라거나 ‘북악에 핀 인동초’라는 민망한 예찬들이 쏟아진다. 건국이래 첫 정권교체이기에 민주주의의 완성이요, 전인미답의 길이란다. 듣기조차 역겨운 쉰 목소리로 줄줄이 찬미가를 불러대고 있다.

잘라묻고자 한다. 우리 언론이 썩어도 이처럼 썩어서야 되겠는가. 봉건시대 지주였던 선비들조차 오늘의 언론인들처럼 안면을 몰수하는 변신을 거듭하진 않았다. 적어도 그들에겐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선 목숨도 버릴만한 기개가 있지 않았던가.

솔직히 말하자. 우리 언론은 단 한 번도 과거를 청산하지 못했다. 오늘 이 순간까지 일본제국주의와 독재정권 그리고 정치군부와 결탁해 호의호식해 온 것이 우리 언론의 ‘주류’였다. 굴절과 왜곡 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킹 메이커’를 자부해온 언론 앞에서 언제까지 우리는 참담함만 느낄 것인가. 젊은 언론인들에게 묻고싶다. 해탈한 듯 뒷짐지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언론개혁을 위해 손에 손잡고 일어서야 한다.

언론개혁의 주체는 누구인가. 두말할 나위없이 바로 언론인들이다. 언론계 스스로가 언론개혁운동에 나서야한다. 마침 각 언론사의 노동조합은 창립 10돌을 맞고 있다. 언론노동운동은 그동안 일방적으로 언론사 경영진들의 봉건적 권력 앞에 휘둘려왔다.

가령 언론자본의 무분별한 신문전쟁에 언론노동자들은, 한 노조위원장의 고백처럼 ‘개 끌리듯’ 끌려다녔다. 더욱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언론자본이 자신들이 저질러온 거품전쟁의 손실을 고스란히 언론노동자들에게 떠넘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대량해고의 위협이 그것이다.

분명 언론개혁운동은 10년전 언론노동조합이 창립된 시점 못지않은 전환점을 맞고 있다. ‘IMF체제’와 정권교체라는 객관적 조건은 개혁주체가 올바르게 대응할 때 언론개혁의 토양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운동을 활성화할 주체의 의지와 역량이다.

언론단체들이 적극 연대해 민주언론운동을 벌여 나가야한다. 언론 현장에 광범위하게 잠재해있는 언론개혁 요구를 조직화해내지 못할 때 우리가 다시 맞은 기회는 언론인들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사라질지 모른다.

최선은 아니지만 언론개혁의 차선책은 새 정권의 개혁정책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김대중 죽이기’라는 말이 상징하듯 그 누구보다 언론으로부터 피해 입은 정치인이다. 그러나 김대중 당선자가 자신이 대선에서 승리했다해서 언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고 판단한다면 큰 오산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70년대 이후 오늘까지 언론을 의식해 정치노선을 시나브로 보수화해왔다. 이는 어찌보면 정치인으로서 패배의 과정이었다. 대통령이 되었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미 언론의 힘은 비대할대로 비대해져있다. 언론과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은 물론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보아야한다. 분명히 경고해두거니와 만일 김대중 당선자가 언론개혁 없이 자신의 개혁정책을 펴나간다면 그의 개혁정책은 곧 왜곡되거나 파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오늘 언론으로부터 마치 ‘죽은 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김영삼 정권은 그 생생한 교훈이다.

재벌언론·족벌언론의 제한과 방송의 정치적 독립 그리고 편집권의 실질적 독립 등 해결해야할 정책과제는 말 그대로 산적해있다. 이는 비단 언론노동조합이나 김대중 정권만의 과제는 아니다. 두 주체로 하여금 개혁에 나서도록 사회구성원들이 조직적으로 언론개혁운동을 벌여 나가야한다. 21세기 앞에서도 여전히 낡은 냉전이데올로기에 찌들어있는 우리 언론을 이대로 두고는 겨레의 통일은 물론 ‘민주발전’도 ‘경제회복’도 이룰 수 없다.

언론개혁, 그것을 새해의 화두로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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