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선거사상 유례없는 ‘욕설’은 끝났다. 입에 담지못할 욕설에도 불구하고 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로 결말이 났다.

이러한 결과는 언론매체들이 과거와 달리 ‘어느 정도’ 중립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했다. C일보 J일보처럼 이회창후보를 편파적으로 지지한 신문도 있었다. 또 ‘형식상 중립’을 존중하는 몸짓을 보인 텔레비전에도 이회창후보는 활기찬 연설과 환호하는 군중이 나오고, 다른 후보는 맥빠진 무성영화로 나오
기도 했다.

매체의 중립은 ‘어느 정도’로만 지켜졌던 셈이다. 하지만 그 정도로나마 중립을 지킨 결과로 정권교체가 가능했다.

김대중씨의 ‘힘겨운 승리’는 단순한 정권교체이상의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김대중후보의
승리라기 보다, 5·16이후 40년 가깝게 이 나라를 지배해온 권력주변집단의 패배를 뜻한다. 이회창후보는 이들이 내세운 ‘대리인’이었다.

따라서 이번 15대 대통령선거 결과는 사회적 질서 재편성의 출발점이자, 그에 못지않게 심리적 충격과 보상(報償)의 성격을 띤다. 개인도 그렇지만, 사회적 집단에게도 심리적 이해(利害)는 현실적 이해 못지않게 중요하고, 때로는 보다 중요하다. 이번 선거결과만 해도 그렇다.

그것은 지역파벌구조와 그 주변을 싸고도는 인맥집단의 패배라는 충격을 주고 있다. 그 동안 다양한 공적(公的)인 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돼온 여타지역, 그리고 권력주변 인맥집단에 아첨할 수 없었던 많은 사람들의 피해의식을 보상해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적 충격과 보상은 결국 일정한 수준에서 사회적 규범과 질서의 개편을 요구할 것이다. 40년동안 권력주변에서 모든 기회와 명예와 이익을 누려온 소위 ‘지도층’집단은 권력기구와 떨어져서 생존하지 못하면 결국 해체될 것이다.

또 권력의 영향 밑에 있는 각종 조직과 단체의 독립성이 새롭게 규정돼야 한다. 국가행정의 뼈대인 공직사회는 법과 양심과 국민에 대해서만 충성을 바치는 독립적이고 전문적인 집단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우리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언론이다.

김영삼정부시대 언론은 권력 그리고 재벌과 ‘유착’을 넘어 선 ‘일체화’로 ‘정-경-언 복합체’를 구성해왔다. 이 정-경-언 복합체는 사실상 이 나라를 주물러온 지배집단이었다.

5조원이 넘는 한보비리도, 6백년만에 처음 본 소통령비리도, 또 오늘의 국가적 부도사태도 권력·재벌과 함께 언론이 책임을 같이 질 수밖에 없다.

언론은 권력과 재벌이 나누어주는 구호를 충실하게 복창하는 확성기역할을 해왔다. 그러는 동안 이 나라는 정치적 구심점이 실종되고, 부도가 나는 참담한 수렁에 빠졌다. 이처럼 참담한 상황에 이르기까지 사상 유례없는 언론의 ‘직무유기’는 지금까지 누누이 지적해온 만큼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최대의 원인은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언론만은 독야청청 책임질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면책특권’을 누려온데 있다. 언론은 5공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과거청산’없이 지배집단의 일원으로 남았다. 좋게 말해서 권력의 통제에 길들여졌고, 정확하게 말해서 권력에 기생해온 ‘사이비 언론인’들은 지금도 언론계의 상층부를 구성하고 있다.

언론을 조종·통제하는 권력라인, 그리고 개개 매체의 고위직은 지금도 이들이 차지하고 있다. 믿어지지 않는 사실이지만 언론은 지금도 5공시대에 살고 있다.

‘언론 5공화국’을 지휘·통제하고 있는 이들 상층부 밑에서 사상 유례없는 권·언 일체화와 경·언 일체화 시대가 열렸던 것이다.

언론이 김영삼정부의 실패, 재벌구조의 파탄이라는 파국의 공동책임을 벗어나자면 먼저 이들 ‘사이비 언론인’을 청산해야할 것이다. 그래서 오직 사실과 양심에 따라 원고를 쓰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독립적인 언론인들이 언론현장의 주인이 돼야할 것이다.

민주적 언론 없이 민주적 국가는 존재할 수없다. 상식과 규범에 맞는 현대적 국가조직을 갖는 민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진실을 추구하고 양심에 따라 제작에 임하는 언론인과 매체가 있어야한다. ‘동서대립’을 새로운 통합으로 이끌고, 국가적 부도를 새로운 기적으로 전환하고, 다가서는 남북통일을 준비하기 위해서도 언론은 거듭 나야한다.

언론은 염치없는 ‘면책특권’을 포기하고, 이번만은 천하에 자신의 과오를 스스로 공개하고 인정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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