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는 현대의 ‘애비’인가. 그 위세는 아이들의 울음을 넘어, 어른들의 입마저 가로막는 파장으로 덮쳐든다. 그쪽의 빚을 얻어쓰게 된 이후, 이땅에선 ‘재협상’ ‘경제적 신탁통치’ 따위는 물론 ‘국치’라는 한숨소리도 금기의 언어로 내몰린다.

그 불호령의 진원이 정작 IMF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나팔수가 언론이라는 사실만은 누구의 눈에도 확연하다. 짜장 영향력을 자랑한다는 언론의 종사자들은 입을 모아 질타한다. 그따위 ‘감정적 대응’으로는 오늘의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 약속을 지켜야 한다! 국론을 통일하고 국민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 액면만으로는 지당하고 또한 지당한 말씀들이다.

그러나 곰곰이 되씹어보기 바란다. ‘국치’의 한숨이 과연 감정의 발성일 뿐인가. 더러의 예외도 있을 터이지만, 그 주종은 역시 치열한 현실인식의 표현이다. 오늘이 ‘국치’의 사태이므로 그들은 ‘국치’를 인식하고 말한다. 오늘이 ‘국치’의 사태이므로 그들은 ‘국치’를 이겨내고자 가냘픈 허리띠를 졸라매며 달러를 내놓는다. 1백억 달러쯤이라고도 추정되는 외화를 움켜쥐고 감춘다는 대기업 또는 특권의 인사들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참으로 질타되어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오히려 ‘국치’의 인식은 앞다투어 열창되는 ‘경제살리기’의 동기이며 동력으로도 타오른다. 심지어 ‘신식민지’의 상황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오늘의 사태를 얼버무리려 하는 쪽의 불감증이야말로 또다른 재앙의 불씨이다. 더구나 현실인식에 앞서야 할 언론의 지각일 수는 없다.

약속의 문제도 겉핥기로만 뇌까릴 일은 아니다. ‘국치’를 ‘국치’로 뼈저리게 인식하는 겨레일수록, 도리어 IMF협약의 큰 줄거리가 현실의 구조로 떠오르기를 소망한다. 아니, 그 협약 이전부터 금융개혁과 재벌해체를 외쳐온 겨레가 바로 그들이다. 지켜 마땅한 약속이라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는 게 그들의 소망이다. 다만 선후가 엇갈렸다고는 할지라도 ‘남의 등’에 탄 외침이 계면쩍어 곤혹스러워할 따름이다.

단선의 현실인식과 단세포의 외침은 정당하지도 못할 뿐더러 호소력을 갖지도 못한다. 국론의 통일도 예외일수는 없다. 여러 목소리의 교향악적 화음이 민주국가의 국론통일이라는 풀이를 구태여 늘어놓아야만 하는가. 한 연주자의 솔로에만 음색을 맞추는게 국론통일은 아니다. 그것은 군사문화의 전성기에 신물이 나도록 들어야 했던 ‘일사불란’의 재탕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한사람을 닮지 않았다는 ‘불초’의 허물은 옛이야기가 되어버린지 오래다. 구태여 ‘다사불란’의 화음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다시금 일어오는‘일사불란’의 호령소리는 어쩔 수 없이 군사독재의 시대에 모기소리로 맞섰던 ‘다사불란’의 낱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날에 못박혔던 ‘국민총화’의 망령이 되살아난듯 싶어 전율하게 된다.

나는 이미 이 글터에 미디어크라시를 말하고, 그래도 희망의 불씨를 언론에서 찾고자 하는 충정을 토로해왔다. 이 글이 찍혀 나돌 즈음이면, 15대 대통령 당선자의 승전보가 울려날 터이다. 그러나 누가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언론들이 새 대통령에게 걸었던 장밋빛 기약이 장밋빛 현실로 피어나리라는 보장은 없다. 아무리 민망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이 얼버무릴 수 없는 현실의 구도이며 정치 지형이
다.

가령 한 입으로는 국론통일을 외쳐대면서도, 다른 한입으로는 IMF협약의 재벌해체를 저마다 달리 풀이하는 거대 언론들이 건재하는 마당에 새 대통령의 운신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매머드를 방불케 하는 재벌과 기득세력 등은 다 접어둔다고 할지라도, 그 중심에 자리해온 재벌언론과 족벌언론의 성화를 이겨낼만한 힘이 있을 것인가. 철딱서니 없는 환상가라는 매질을 감수하고라도 결연히 말하고자 한다.

더 이상 부끄러운 언론, 더 이상 역사 앞에 죄를 짓는 언론의 전철만은 되풀이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재벌과 금융 그리고 그 고리인 정경유착에 정의의 칼을 든다면, 새로운 그를 엄호해 주기 바란다. 남의 나라의 관례인 ‘밀월’도 서슴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러나 새로운 그가 만에 하나, 불의에 편들고, 이 나라를 이 꼴로 만든 환부를 도려내지 않는다면 그대들이 오히려 정의의 칼을 들어주기 바란다. 그것이 바로 도탄에 빠진 나라와 겨레를 구하는 길이다. 오늘의 위기는 흔히 말해지듯 외환 금융 또는 경제의 위기만은 아니다. 정치와 사회와 문화의 위기이기도 하다. 이 땅의 언론은 마땅히 오늘의 총체적 위기에 가슴으로 맞서 내일의 빛을 이끌어내야 한다.

그 역사의 부름을 저버린다면, 언론의 난파라는 비극을 막을 길이 없다. 언론의 ‘반언론적’ 전철은 공멸의 수렁을 부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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