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꼴이 말이 아니다. 국가 부도사태 때문만은 아니다. 치욕적인 IMF 구제금융 조건을 들어 하는 이야기만도 아니다. 나라 꼴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하고, 끝까지 위기를 위기로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국민들을 속이는데 여념이 없었던 정부의 무능과 무대책 탓만도 아니다. 정작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실정(失政)에 책임지려는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다.

국가경제 파탄의 1차적 책임은 말할 나위 없이 김영삼 대통령과 정부에 있다. 그 다음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면 ‘재벌’이다. 김영삼 정권의 경제정책은 사실 재벌의 입장을 그대로 옮겨놓다시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위기를 이렇게 증폭시키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감시·견제기능의 부재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감시및 견제기제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이같은 위기는 사전에 어느 정도는 완충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우리사회의 감시·견제기제는 철저하게 무력했다.

여기에는 지식인집단 모두가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언론의 책임이 가장 크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초까지 재벌의 입김에 따라 ‘경제위기론’을 앞다투어 부각시키다가 정작 경제가 혼란국면으로 들어선 올 중반기 이후에는 한국경제의 앞날을 낙관하는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이 역시 재벌들이 운영하는 민간연구소의 발표등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었다. 한국의 외환보유고가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외국언론의 ‘경고’에도 ‘터무니없는 비방’이라는 정부의 ‘억지주장’을 앞장서 대변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언론은 자신들의 과오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국민적 분노에 편승해 김영삼대통령과 관료들을 매섭게 추궁하고 있을 뿐이다. 나아가 대통령선거를 며칠 앞둔 시점에서 책임의 소재마저 제대로 따지지 않고 있다. 이미 ‘동네북’이 돼버린 김영삼대통령과 경제관료들에게는 질타를 보내면서도 정작 선거에서 심판받아야 할 집권당에 대해서는 책임 추궁을 주저하고 있다. 총체적 경제난국을 부른 정부와 집권당의 재벌정책과 재벌들의 방만한 빚경영등 ‘부도경제’의 핵심에 대해서도 피해가기에 급급하다. 그러다 보니 정치권의 책임공방만 대책없이 불거지고 있는 꼴이다.

우리 언론은 시종일관 이번 대선이 정책선거가 돼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가부도사태에 대해 집권당은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고 분명하게 따져야 한다. 그런 가운데 집권당의 대책은 무엇인지, 야당들의 대안은 또 어떤 것인지를 국민들이 비교 평가할 수 있게 해줘야 한다. 그래야만 책임지는 정치, 책임을 묻는 정치가 가능하고 정책선거의 싹도 틔워나갈 수 있다.

그러나 참으로 희한하게도 이번 선거는 ‘집권당’이 없다. 한나라당은 당내분 과정에서 대통령이 탈당했다는 이유로 집권당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다. 한겨레등 극히 일부 언론을 제외하곤 이같은 편리한 ‘탈바꿈’을 그다지 문제삼지도 않는다.

대다수 언론이 나라를 이꼴로 만든 집권당에게 응분의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는 것은 ‘공범의식’ 때문일까. 그렇다면 언론이야말로 이나라 경제파탄의 ‘주역’이란 낙인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집권당 편들기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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