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4월 23일 일본의 신문노동조합연합(신문노련, 위원장 키타무라 하지메)의 중앙위원회는 후지산 자락의 소읍 후지노미야(富士宮)에서 열렸다. 토쿄나 오사카 같은 곳이 아니라 교통도 불편하고 인구도 10만여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에서 신문노련이 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곳에서 발행되는 가꾸낭아사히(岳南朝日) 신문 때문이었다.

이름 때문에 일본 굴지의 아사히신문의 지사가 아닌가 하겠지만, 사주가 과거 아사히 신문의 판매점을 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관련이 없다. 문제는 이 신문사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자 사측이 기자 3인을 해고한 것.

사태의 발단은 94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노조가 결성되자 사측은 조합게시판을 뜯어내고 노조간부들을 다른 직종으로 발령하는 등 탄압을 시작했다. 그해 9월에는 야자키(矢崎)위원장을 해고하고, 노조의 핵심인물인 카타오카(片岡) 사무장을 신문 확장요원으로 발령하였다.

그래도 노조가 굴복하지 않자 회사측은 흥신소 직원을 시켜 카타오카 기자를 근 1년간 미행한 뒤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95년 10월 해고했다. 그후에도 조합원에 대한 몇차례의 부당전직이 발생한 끝에 작년말에는 노조 집행위원인 고참 기자 스즈키(鈴木)씨가 세 번째로 해고당했다.

이로부터 해고자들의 원직복직 투쟁이 전개되고 이 신문은 파행을 거듭했다. 출근투쟁과 법정 소송 끝에 해고자 2인은 지방노동위원회와 법원으로부터 해고무효 판결을 받았으나 사측은 항소를 거듭하며 이들의 복직을 거부하고 있다. 카타오카씨는 법원의 가처분 결정으로 일단 회사에 출근할 수는 있게 되었으나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나날을 근 3년째 계속하고 있다.

그 동안 다른 신문사 노조, 지역 시민단체들과 연대집회를 벌이고 국내외 기관에 호소하는 등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이들의 투쟁은 오는 5~6월경 법원과 노동당국의 최종결정과 ‘명령’이 나오면 한 고비를 넘길 것으로 보인다.

이를 앞두고 신문노련이 가꾸낭아사히 신문노조에 대한 총력 지원을 결의하기 위해 중앙위원회를 개최한 것이다. 중앙위원회에 앞서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신문사 노조 간부들은 후지노미야 시내에서 집회를 열고 거리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일본에 가서 이런 일을 보며 든 느낌은 선진국이라는 곳에서도 언론자본의 행태는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카타오카 기자에게 “회사측이 왜 그런 행동을 한다고 보는가”고 물었더니 “단지 노동조합을 싫어하기 때문”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인구 10만명의 도시에서 2만5천부를 발행하는 이 신문사는 창업주와 그 아들이 사유물처럼 운영하고 있고 직원 60명의 1/3이 그들의 친척혹은, 연고자라 한다. 자기 것이나 다름없는 신문사에 노동조합이 생겨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도저히 못보겠다는 것이다. 신문노련의 관계자도 “소유와 경영, 편집이 분리되지 않는 한 이같은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신문 해직기자들의 투쟁도 어느 면에서는 놀라웠다. 어찌보면 작은 지방신문에서 벌어진 사소한 일로 보일 수도 있는데, 카타오카 기자 등은 인근 지역과 일본 각지는 물론이고 국제노동기구(ILO), 유엔 인권위원회까지 찾아가 호소했다고 한다. 3년을 끈 투쟁에 조합원들도 얼마 남지 않고 회사측의 태도도 전혀 변화가 없지만 “끝까지 싸우겠다”는 카타오카 기자에게 “한국에서는 10년을 넘게 투쟁을 벌여 복직된 해고자도 있다”고 말해주었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