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에 정치 바람이 불고 있다.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천명한 노동계가 연말 대통령 선거와 관련된 방침 마련을 위한 내부 논의가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7일 오후 서울 충정로동의 기독교선교교육원에선 세간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노동계에선 상당히 비중있는 모임이 개최됐다. ‘노동자의 정치세력화와 97년 대선’이란 주제로 민주노총 간부토론회가 열린 것이다.

“정치세력화는 역사적 필연"

이날 모임에선 민주노총의 올해 대선 방침과 관련해 접점이 형성되고 있는 세가지 정치적 견해들에 대한 개괄적 설명과 토론이 이뤄졌다.

먼저 얘기된 것은 독자후보론이다. 민주노총이 올해 대선에 독자 후보를 내세워 참여해야 한다는 견해이다. 최근 한보 특혜 비리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국민적 불신을 증폭시키고 있다. 반면 민주노총은 지난해말 총파업 과정에서 확인됐듯 점차 국민적 지지가 확산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독자 후보를 내세워 대선에 참여할 경우 부패한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염증과 대안 세력에 대한 기대 심리에 힘입에 당선은 어렵더라도 민주노총의 정치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견해이다.

이를 통해 대선 이후 노동계의 강화된 발언권을 매개로 법적, 제도적 개혁을 이뤄내고 노동계의 정치세력화를 실현할 정치조직을 건설하자는 주장이다. 즉 기성 정치권과는 분명한 선을 긋고 홀로서기 노선을 견지하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야권 제휴론이다. 올해 대선에서는 야당과 연대함으로써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내야한다는 견해이다. 올해 대선은 그 어느 때보다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뤄낼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DJP은 그같은 정권교체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현재의 정치 구도를 단순한 지역대결구도 봐서는 곤란하며 ‘저항적’ 지역주의와는 적극 연대해야 한다.

노동계가 반신한국당 연합에 참여해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해냄으로써 대선 이후에 정치적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같은 야권제휴론은 그동안 재야 민주단체들이 견지해 온 전통적 민주대연합론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 노동계에선 당장 이번 대선에 대응하기 어려운 만큼 중장기적 관점에서 착실히 준비하자는 대기론이 제기되고 있다. 87년 이후 두차례 대선에서 경험했듯 패배할 경우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다. 자칫 총파업 투쟁의 성과를 모두 상실할 우려도 없지 않다. 또한 당장 산별 노조 건설 등 현안 과제도 산적해 있는 만큼 조직 역량에 맞게 차분히 접근하자는 견해이다.

이날 토론회는 어떤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한 자리는 아니었다. 올해 대선을 거치면서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는 대전제 아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세가지 견해를 정리해보고 이후 민주노총의 대선 방침 논의에 물꼬를 터보자는 취지에서 이뤄진 모임이었다.

참석자들이 빠른 시일안에 민주노총 중앙위원회 차원에서 대선 방침을 공론화하는 게 시급하다는 데 공감을 표시한 것도 이같은 맥락에서였다.

행동통일까지는 험한길

이렇듯 노동계는 아직 대선과 관련한 방침을 통일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세가지 견해 역시 점차 논의의 참여 범위가 확산되고 있지만 노조 간부들 사이에서 거론되는 수준이다. 각 조직에서 공론화 과정을 거치기에는 좀 더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대통령선거가 6개월여 정도 남은 것을 볼 때 노동계의 통일된 행동 방침을 결정해야 할 시점이 임박한 상황이다.

그러나 노동계가 대선 방침 논의를 공론화하는 과정에서 해결해야 할 숙제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당장 세가지 견해의 입장 차이를 조율하고 하나의 방침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많은 논란이 예상된다. 설사 통일된 행동 방침이 합의된다해도 실제 현장 노동자들 속에서 이같은 행동 방침이 일사분란하게 관철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아직 많은 현장 노동자들이 정치권의 고질적 병패인 지역주의의 영향권 안에 있는 실정이다. 새노동법이 적용되는 올해 임단협 기상도가 그다지 희망적이지 못하다는 것 또한 현장 노동자들 사이에서 정치 방침을 공론화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이렇듯 험산준령을 넘어 이르게 될 노동계의 통일된 대선 방침이 어떤 모습일 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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