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고장에서 ‘군자’소리를 듣는 위선자를 ‘향원(鄕愿)’이라고 한다.

“비난하려해도 꾸짖으려해도 ‘이렇다’고 꼬집을 게 없고, 세상 풍속(風俗)에 동조하고, 태도는 충직하고 신의가 있는 것 같고, 행동은 청렴결백한 것 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좋아하고, 자기도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향원이다(<맹자>진심 하). 원래 향원은 “사이비”의 일종으로 “덕을 어지럽히는 덕의 적(賊)”이라고 공자가 말했었다.

향원은 세상에서 흔히 보는 저열한 인간형이다. 유명한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王陽明·1472~1528)은 “나도 한때 향원의 기풍을 벗어나지 못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한보청문회가 빈 손 든채 끝나기가 무섭게 신문·방송은 대통령선거 바람몰이에 나섰다. 마치 ‘한보’는 사실상 끝났다는 자세다. 줄줄이 후보 예비군을 앞장세움으로써 세상사람들의 눈을 한보로부터 돌리는 형편이 됐다.

‘세상 풍속에 동조하고, 충직하고 신의가 있는 것같고, 청렴결백한 것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제 이런 사람들이 떼지어 목청을 돋울 참이다.

‘세상풍속에 동조’하는 것이 세상 인심에 동조하는 것이니까 민주시대의 정치인답다. ‘청렴결백한 것같아서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는 사람’이란 부정부패에 물들지않은 것으로 알려져 여론조사결과 인기가 1·2위를 다투는 선두주자임을 뜻한다.

앞으로 시간이 흐를수록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치고 “나야말로 그런 사람”이라고 주장하지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97년의 선거전에서는 ‘부정부패’가 최대의 쟁점이 될 것은 확실하다. 그래서 “나야말로 깨끗한 사람”이라는 자화자찬이 국민의 판단력을 혼란스럽게 만들 것이다.

특히 신한국당의 후보경선과정에서 자칭·타칭 ‘깨끗한 사람’들이 풍년을 이룰 것이다. 그만큼 김영삼대통령의 정부-여당은 다급한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총칼로 국권을 찬탈한 군사정권의 시대는 갔지만, 김영삼정부는 총칼대신 돈더미의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다.

5조원이 넘는 사상 최대급 한보비리는 깃털급 송사리에다 여·야 혼성팀으로 이루어진 정태수리스트 연루자들을 덤으로 붙여 매듭지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동안 ‘소통령’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돈사냥을 해왔다는 사실이 검찰에 의해 밝혀지고 있다.

결국 대통령의 수족이라고 해야할 청와대의 수석, 그리고 대통령의 아들이 비리에 연루돼 심판대에 서
고 대통령만 ‘독야청청’ 성역에 남아있는 꼴이 됐다. 상식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김대통령이 완강하게 잡아떼어 왔던 92년 대통령선거자금의 내막도 입장을 밝혀야될 상황이다. 쓰고 남은 돈까지 노출됐기 때문이다.

이 위기상황에서 정권 재창출을 하겠다고 나서는 신한국당의 후보는 상식이상으로 ‘청렴결백’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현철 비리’는 법대로 처리해야된다던가, 김대통령의 선거자금내막도 밝혀야된다는 발언이 나온 것도 그런 상황을 반영하고 있고, 선거전이 진행될수록 이런 종류의 목소리는 더 커질 것이다.

문제는 그 ‘청렴결백’의 논리적 정당성이다. 이들 청렴결백의 기수들은 “진흙탕에 몸담고 있지만, 나만은 깨끗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해야할 것이다. 그 자신이 그 집단의 일원으로 지위와 명성을 차지해 왔기 때문이다.

그만큼 ‘신한국당 사람’들은 자세를 낮춰 겸손해야한다. 또 사죄하는 자세로 국민앞에 서야한다.
올해의 선거전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인간적인 ‘사랑과 미움’의 대결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청렴결백’을 깃발로 내세우는 편가르기는 최악의 경우 ‘너 죽고 나 죽자’로 끝날 수도 있다. 사죄하는 자세가 아니라, 거꾸로 성인군자로 행세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군사정권의 강권통치 30여년동안 우리사회에는 직업적인 명사(名士), 직업적인 사회지도층이 대량생산돼 왔다. 이들은 직업이 ‘명사’요 ‘사회지도층’일 뿐이다. 한국적인 향원의 집단이다.

이들은 권력과 재벌 그리고 언론의 유착체제에 기생해서 사회적 명성과 명예를 독점해 왔고, 지금도 독점하고 있다. 이와는 또다른 ‘청렴결백’을 전문직업으로 하는 신종 향원의 등장을 경계해야한다. 우리의 소망은 ‘정직한 공인(公人)’이다.

더구나 민주사회의 정치인은 무엇보다 국민앞에서 허리를 굽히는 겸손을 기본적인 미덕으로 삼아야한다. 사죄할줄 모르는 신한국당 사람들에게 특히 강조해둬야할 일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