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3월 4일자(135호) 5면 <‘경제회생’만이 ‘유일가치’>기사에 대해 한국일보에서 반론문을 보내왔다. 비평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지면을 통한 토론이 활성화돼야 한다는 점을 감안해 이를 게재한다.

나의 작은 글이 이런 파장을 가져올지는 몰랐다. 한국일보 <앞과 뒤>난에 ‘DJ 과거 바로세우기’가 실린 날 독자들로부터 많은 전화를 받았다. 잘못된 과거를 그대로 묻어두자는 얘기냐는 항의와 자신의 생각을 대변해줘서 감사하다는 격려까지 독자들의 반응은 여러가지였다.

조선일보의 김대중 주필까지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반갑다”고 관심을 표명해 주었다(김주필의 동의없이 이 사실을 공개하는 것이 큰 실례가 아닌지 송구하다). 기자의 미천한 글이 김주필의 칼럼과 함께 ‘미디어 오늘’에 ‘씹히게’된 것이 우연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수많은 독자를 상대로 한 글쓰기의 두려움이 새삼 엄습한다.

미디어 오늘에 항의하거나 변명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나의 글에 관한 기사가 미디어 오늘에 실리게 된 것을 ‘가문의 광영’으로 여기라는 동료기자들의 말에 일리가 없지않다 싶기도 하다. 다만 최근 기자가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국어의 문제’에 대하여 한마디 하고 싶을 뿐이다.

국어의 문제. “아”했는데 “어”로 이해되는 의사소통상의 문제다. 물론 나의 국어가 문제일 수도 있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국어가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필자 또는 화자의 진의를 이해하려는 진지성의 결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조직사회에서 흔히 목격되고 있는 국어의 문제는 알고보면 ‘진지성의 문제’다. 진지함의 결여가 성의부족으로 초래된 것이라면 별일 아니다.

그러나 성의차원을 떠나 섹트나 파벌, 또는 계층·계급적 이해가 작용하는 ‘국어의 문제’가 많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야의 입들간에 펼쳐지는 질낮은 말꼬리잡기 싸움은 파당적 이해에 의한 전형적인 국어의 문제이자 국어모독이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자들도 자신도 모르게 국어의 문제에 휘말리는 경우가 있다. 나의 글에 대한 미디어 오늘의 지적은 그 글이 갖고 있는 그런 위험성을 경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굳이 글쓴 의도를 밝히자면 개혁진영의 전술전략적 오류를 지적하고 싶었다.

국어의 혼란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어의 문제를 극복하는 지혜이다. 복어가 갖고 있는 독만을 보면 우리는 맛좋은 복어요리를 먹을 수 없다. 복어에서 독을 제거하는 지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 독도 잘만 쓰면 약이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국어의 문제는 종종 대화의 부족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국어의 문제는 대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대화는 소주잔을 곁들어야 제맛이 난다. 국어의 문제가 ‘소주의 문제’이기도 한 이유이다. 미디어 오늘의 기자들과 복매운탕 안주에 ‘쇠주 한잔’하고 싶다. 그 자리에 조선일보의 김주필도 모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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