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인 사법제도가 실현되기전 왕조시대에도 ‘법의 문턱’을 낮춰야할 필요성이 인식돼 있었다. ‘훈민정음 원본’의 서문을 쓴 정인지(鄭麟趾)는 말했다.

“중국의 글자를 빌어 써서 통하게 하니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자는 그 곡절의 통하기 어려움을 괴롭게 여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 스물여덟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하루 아침안에 깨칠 것이요,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안에 배울 수 있다. 이로써 송사(訟事)를 들으면 가히 그 정상(情狀)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앞서 세종대왕은 지방의 수령들이 백성에게 속어(일상생활의 말)로 법을 가르치라고 명했었다(세종 2년). 한글을 만든 동기의 하나로 ‘법의 정의(正義)’가 고려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부터 5백수십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법의 문턱은 보통사람들이 넘기 어려운 ‘성역(聖域)’에 속한다.

지난해 11월 아들의 누명을 벗기려고 4년 넘게 법정 투쟁을 벌였던 한 어머니의 수기 ‘법대로인가 멋대로인가’가 화제에 올랐었다.

갓 서른의 아들은 한밤중 길에서 20대 여인과 시비가 붙어 빰을 두번 때렸다. 경찰조사에서 아들은 엉뚱하게 강도상해범으로 둔갑했다. 결국 그는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4년여에 걸쳐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실제적 진실보다 절차를 더 중시하는 사법관행”을 원망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는 반대되는 일도 있다.

지난해 41세의 한 남자가 서울의 지하철에서 여자승객에게 성추행을 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혔다. 소매치기 검거용 카메라로 성추행현장을 찍어 증거를 확보한 경찰은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더구나 그는 상해혐의 기소유예등 전과가 세차례나 있었다.

그러나 법원의 담당판사는 ‘이례적으로’ 영장실질심사없이 기각했다. 성추행 용의자는 서울지법의 사무관이었다.

이처럼 법원, 또는 재판소는 보통사람이 넘보기 어려운 신성불가침의 성역이다. 언론에게도 역시 성역이다.

언론의 제작현장에는 하나의 엄격한 불문율이 있다.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글은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법의 독립성, 따라서 재판의 공정성을 침해해서는 안된다는 데서 나온 원칙이다.

그것이 확대적용돼서인지 한국의 언론은 사법부, 그리고 재판의 결과인 ‘판결’을 비판하는 일이 없다. 판결은 하나님의 말씀처럼 의문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 명령이다.

여기에다 댄다면 미국의 사법제도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배심원’을 통해 재판이 개방적으로 검증되고, 법의 테두리안에서 시민의 법감정이 ‘유죄·무죄’를 판단하는 과정에 참여한다.

흑인 미식축구의 슈퍼스타 심슨의 살인혐의 공판과정은 우리 기억에 아직도 생생하다. 사건은 94년 6월 심슨의 전처와 그의 남자친구가 심슨의 집 현관앞에서 칼에 난자당한채 죽은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형사재판의 배심원들은 ‘심슨 무죄’, 민사재판의 배심원들은 ‘심슨 유죄’를 평결했다. 한쪽 배심원은 흑인이 다수를 차지했고, 다른 한쪽은 백인이 3분의 2를 차지했었다.

형사 평결은 ‘확실한 증거’가 판단기준이 되고, 민사평결은 ‘우세한 증거’쪽에 기준을 둔다는 법운영의 원칙에 따른 것이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언론조차도 성역으로 모시는 한국의 ‘법’은 제3자의 검증과 비판이 없는 법관의 에덴동산이다.

어떤 제도, 어떤 조직이건 밖으로부터의 감시와 비판이 없다면 권력남용과 부정부패를 막을 수 없다. 법을 다루는 법원과 법관도 마찬가지다.

서울지법의 의정부지원 판사 9명이 변호사들로부터 돈을 받아왔다는 사실은 이러한 우리의 우려를 정당화해준다.

돈거래는 ‘유전무죄’의 씨앗이 되고 결국 ‘무전유죄’에 통한다. 게다가 ‘전관예우’의 관행은 법관의 자리가 변호사 개업을 위한 ‘경력쌓기’쯤으로 전락하게 한다. 또 돈거래가 과연 의정부에서만 있었는지 의문을 갖는 것도 자연스런 일이다.

사법의 독립성이라는 명분밑에 사회적 검증과 감시와 비판이 존재하지않는 현실이 문제다. 배심원제도는 미국의 여가와 문화의 산물이지만, 우리도 사회적양식이 법운영에 참여하는 길을 터야 한다.

그 첫걸음은 언론이 적극적으로 법정의 판결을 감시하고 검증하는 것이다. 재판에 영향을 주지않는다는 원칙은 존중돼야한다. 그러나 재판의 결과인 ‘판결’은 당연히 논평하고 비판해야 한다. 많은 판결이 대부분 공정할 것으로 믿는다해도 ‘백에 하나’의 잘못도 없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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