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통제의 최선두에 서서 정권유지의 첨병을 담당했던 공보처가 새정부의 정부조직 개편에 따라 역사의 뒷길로 사라졌다. 공보처는 미군정청의 공보부로 출발, 공보처, 공보부, 공보국, 문화공보부 등 이름을 달리하며 50여년 넘게 존속되어 왔었다.

공보처는 미군정청의 공보부 시절 산하에 방송국을 운영했다. 특히 이승만 정권 들어서 ‘공보처’로 개명되면서 경성방송국은 물론 9개 지방 방송사를 산하에 두게 되는데, 미군정하에서는 그나마 형식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던 방송사들은 이때부터 이승만 정권의 앞잡이가 되어 철저한 반공정책을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공보처는 이승만 정권의 집권연장을 위해 언론통제를 강화하는데 그것이 바로 55년 ‘출판물에 관한 임시조치법’ 파동과 57년 ‘국정보호 임시조치방안’ 파동이다. 전자는 정기간행물이 민심을 호도하기 위한 허위사실을 보도할 경우 공보처장관이 정기간행물의 허가취소와 발행정지를 명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허위 사실 게재로 명예훼손을 할 경우 집필자와 편집자를 처벌한다는 것. 이 두 조치는 언론계의 반대로 무산된다.

60년 제2공화국 시절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공보처는 국무원 사무처 산하 공보국과 방송국으로 해체되는 듯 했으나 5·16군사구테타 이후 곧 공보부로 승격된다. 또다시 언론통제 기구로 나선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권력을 잡자 공보부령 제1호로 신문통신사 기준령을 발표, 9백16개였던 언론사를 82개로 강제축소시켰으며, 프레스카드제의 도입을 시도하는 등 공보처를 통해 언론통제를 행한다.

그러나 68년 문화공보부로 이름이 바뀐 공보처의 언론통제 기능은 사실상 80년 신군부가 집권하면서 노골적인 형태로 진전 된다.

신군부는 문공부 산하에 홍보조정실을 두어 언론사 편집국·보도국에 보도지침을 시달하며 매일의 보도를 통제했다. 이 보도지침은 보도 ‘가’ ‘불가’ ‘절대불가’라는 지시용어들을 구사하고 사건이나 상황, 사태의 보도여부를 일일이 제시하면서 보도방향은 물론 보도의 내용과 형식까지 구체적으로 결정했다.

6공은 물의를 일으켰던 문공부의 홍보조정실을 폐지하고 보도지침과 같은 강압적인 언론통제 대신 홍보정책실을 신설, 언론인과 개별 접촉해 언론을 통제하는 방식을 취했다. 이는 언론인 개별접촉보고서가 폭로되면서 드러났는데 그 내용은 당시 문공부의 정책관이 조선일보의 편집부장을 만나 통일원장관 기자회견을 1면 톱으로 하고 사설, 해설을 요청했다는 내용 등이었다.

그 다음 날자 조선일보에 개별접촉보고서 내용 그대로 반영된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6공시절 공보처의 언론통제 행태가 폭로됐던 것이다.

6공 시절 문공부는 또한 6공 최대 특혜사업중의 하나로 지목되고 있는 SBS의 설립을 허가하기 위해 방송법 개정을 강행하면서 언론계 시민단체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게 된다.

김영삼 정부 들어서 문화부와 분리되면서 이름을 다시 찾게된 공보처는 6공의 언론인 개별접촉서 작성과 같은 노골적인 언론통제 모습은 하지 않았지만 장관 등 공보처 관계자들이 직접 언론사 사주나 편집·보도국 관계자들을 만나 보도협조 요청을 하는 등 언론통제의 역할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다.

공보처는 또한 케이블 TV, 지역민방 등 다수의 방송국을 허가, 방송산업 피폐화를 초래하고 또한 허가 과정에서 특혜 의혹을 사는 등 김영삼 정권 기간 내내 잡음의 주인공이 되어야 했다.

결국 공보처는 정권교체가 되면서 50여년 과거의 잘못으로 폐지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저작권자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