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다면 공교롭게도, 5·18 광주 민중항쟁 열여덟돌 이전부터 타오른 인도네시아의 불길은, 그 이후에도 갈아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땅의 언론들도 나날이 타오르는 그땅의 불길을 선연한 화면과 커다란 지면으로 전해준다.

당연한 일이다. 인도네시아의 불길은 우리에게도 강 건너 불일수만은 없다. 당장 그 땅에 살고 있는 겨레의 안녕도 걱정이거니와, 경제에 미칠 파장 또한 이만저만이 아닌 탓이다. 그 파장은 필경 IMF의 터널을 뚫어가는데도 무거운 영향을 끼칠 터이다.

그뿐인가. 부패와 족벌지배로 얼룩진 그 나라의 장기독재가 어떻게 마무리될 것인지는, 인류의 보편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독재와 맞선 민중의 힘이 어떤 결말을 낳을 것인지가, 우리의 눈길을 붙잡아 맨다.

그러나 나의 관심은 5·18과 인도네시아 사태의 대비,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그것을 전해주고 전달하는 언론의 대비에 쏠린다.

분명히 저들의 불길은 한편으로 독재에 항거하는 ‘봉기’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폭동’과 ‘약탈’의 모습으로 펼쳐지고 있다. 군과 그들의 진압작전도 한편으론 닮은 꼴이면서, 다른 한편으론 전혀 닮은 꼴이 아니다.

거리에 쓰러진 시위대를 후려치며 짓밟아대는 참경은 5·18의 그날을 전율로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시위대와 어깨동무하고 걸어가는 군인이나, 강온으로 엇갈린 군부의 태도는 오히려 4·19의 그날을 연상케도 한다.

아직 상세한 평가를 내릴만한 자료를 손에 넣지는 못했으나, 저들의 언론 또한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이땅의 언론들은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실제보다 훨씬 진정된 것처럼 현지 텔레비젼들이 일제히 보도한 데 대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고 전한다.

국영방송을 비롯한 5개 민영방송들은 독자적인 취재를 포기한채 공동취재로 똑같은 뉴스를 내보내고, 일부 지역에서 ‘소요’를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소식도 아울러 전해준다. 비록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전제가 다르다고는 할지라도, 5·18의 그날에 보여주었던 이땅의 언론들과도 비슷한 모습이다.

그러나 분명히 다른 점은, 그 보도의 편향과 불공정을 들추고 나선 것은, 바로 저들의 언론이라는 사실이다. <자카르타 포스트>라는 저들의 신문은 방송들의 그릇된 보도를 지적하고, “그것은 기만일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논평을 곁들였다고도 한다. 5·18의 그날에 이땅의 어떤 언론이 스스로 언론의 보도를 조심스럽게나마 문제 삼은 일이 있었는가.

이땅의 언론들은 오늘, 인도네시아 사태를 비교적 차분하고 ‘공정’하게 보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폭동과 약탈까지도 일방적 매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지만은 않는 것으로 비친다.

어쩌면 그 모두가 남의 나라 일이기 때문이며, 또한 18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이땅의 언론도 그만큼 성숙해졌기 때문이라고 헤아릴만 하다.

그러나 한치의 약탈도 없었던 그날의 광주를 이땅의 언론들은 어떻게 그려냈던가. 나도 그날, 어떤 외신특파원이 그날의 사태를 똑바로 외쳤던 것을 잊어버릴 수 없다. 사무치는 가슴으로 되새기고 또한 되새긴다.

그것은 ‘폭동’(Violence)이 아니라 ‘봉기’(Insurrection)였다. 또 다른 외신특파원의 증언도 잊혀지지 않는다. “항쟁지도부의 벽에는 두 단어가 생생히 남아있었다. 다름아닌 ‘세계평화’였다!”

더 이상 그날의 ‘봉기’를 왜곡하고 ‘평화’에의 목마름을 짓밟았던 언론의 치부를 들추고 싶지는 않다. 이제 5·18 열여덟돌의 기념식이 사상 처음으로 공중파 방송으로 중계되기도 한다.

5·18의 진실, 학살의 참상을 드러내는 특집방송도 방송되는 오늘이다. 케케묵은 소리라는 핀잔을 무릅쓰고서라도 참으로 ‘상전벽해’라는 한마디를 외치고 싶다.

그러나 5·18의 진실은 아직도 그 일단의 모습만을 확인하는 데 그치고 있다. 학살의 원흉들은 정치게임의 수작을 타고 사면되어버렸으며, 그 하수인과 추종의 무리는 아직도 양지의 햇살을 누린다.

언론도 비슷하다. 편파와 왜곡을 주도했던 무리가 이렇다할 참회도 없이 오늘의 언론을 주도하는 ‘주류’로 군림한다.

그들의 장벽은 여전히 5·18의 진실복원을 가로막는다. 진실과 정의, 민주와 평화라는 5·18의 정신이 언론에 투영될수도 없게 한다. 아직껏 해직언론인의 진정한 복권과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도 다른 역학에서가 아닐 터이다.

‘광주’의 그날과 ‘자카르타’의 오늘을 돌아보며, 역시 “광주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해묵은 아포리즘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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